<?xml version="1.0" encoding="UTF-8"?>
<rss version="2.0">
  <channel>
    <title>backup</title>
    <link>https://chae-back.tistory.com/</link>
    <description>chae-back 님의 블로그 입니다.</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pubDate>Mon, 5 Oct 2026 09:32:59 +0900</pubDate>
    <generator>TISTORY</generator>
    <ttl>100</ttl>
    <managingEditor>짼젤</managingEditor>
    <item>
      <title>十円の呪い</title>
      <link>https://chae-back.tistory.com/5</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 style=&quot;color: #9D9D9D;&quot;&gt;일고교 짭근 AU&lt;/span&gt;&lt;br&gt;&amp;nbsp;&lt;br&gt;&amp;nbsp;&lt;br&gt;모가미 유리에게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태도가 웃어른의 눈에 버릇없어 보일 것이매 넘어지기 쉬운 버릇이니 교정하는 게 좋다고 하루가 멀다고 지적했으나 유리는 부모의 장례식에서마저 상복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자판기 버튼 두 개를 한 번에 누르는 발랑 까진 아이로 자랐다. 모가미 일가가 파멸을 맞이했을 때 아들은 슬퍼할 틈도 없이 발로 뛰어야만 했다. 쌩쌩한 무릎 관절이 다 나갈 정도로 오래 정좌해야 했고, 이름도 항렬도 심지어는 얼굴도 모르는 친인척-이제 와 회고하건대 그게 정말 혈족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및 지인과 어색한 만남을 가져야 했으며 점점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떠 가며 꼬박 이틀 밤을 새워야만 했다. 그는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고서야 겨우 사찰 가장 안쪽을 벗어날 수가 있었는데, 자판기 앞에 섰을 때 주머니에 든 동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챙긴 동전이 묘하게 크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모자란 십 엔은 어깨 너머로 침범한 다른 이가 치러주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자신을 나카에 료타라고 칭했다. 료타는 허리를 숙이는 수고까지 들여 작은 손에 음료 한 캔을 쥐여주고 난 후 한참 어린 유리에게 양손으로 명함을 건넸다. 유리는 선뜻 받아든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장난질이 아닌 진짜 어른의 명함을 쥐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부친에게는 번듯한 명함 하나가 없었기 때문이다.&lt;br&gt;&amp;nbsp;&lt;br&gt;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특별히 더 고통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하루를 삼키는 데 드는 수고를 축소시켜 주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사실 그는 제 삶을 그리 고통스럽다 여기지도 않았으므로 그다지 애쓸 필요도 없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던 유리는 손에 잡힌 코인 하나를 퉁겨 올렸다. 양면이 사정없이 뒤집히며 허공 속에서 회전한다. 자연스럽게 손등 위로 추락한 코인에는 벚꽃도 오동나무도 아닌 유치한 단풍이 그려져 있다. 그건 게임센터의 기기에서만 통하는 마법의 화폐였다.&lt;br&gt;&amp;nbsp;&lt;br&gt;나카에 치세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아주 풍족했느냐면 또 긍정할 수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그랬다. 그에게 부족한 거라고는 예의나 배려 따위가 전부였다. 그로 인해 건전한 친구도, 좋은 성적도 남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나카에 가는 여전히 치세를 사랑했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하여 치세는 교무실 한복판에서 출석부로 머리를 후드려 맞는 일이 있더라도 여전히 뻣뻣한 고개를 숙이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남의 말이라고는 잘 들어 먹지를 않으니 치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 뿐이었다. 갑자기 현관을 박차고 침범한 유리 역시 그 인생에 큰 오점도 치적治績도 되질 못했다. 당장에는 말이다.&lt;br&gt;그러나 무슨 일에건 예외는 있다. 누군들 치세의 거센 성질을 영 버티질 못해 학기가 시작하고 일주일이 못 지나 그의 곁에서는 멀쩡한 여학생을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며칠 전부터 눈에 거슬리는 학생이 하나 생겼다. 목전에 닥친 일을 회피하고 보는 성향은 못 되었기에 삼 일간 초짜 스토커처럼 붙어 다니는 여학생을 무리하여 양지로 끌어내고야 마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 애는 남의 캐비닛에 마음대로 손을 대는 현장을 발각당했음에도 좋아하는 연예인을 본 팬마냥 양 뺨을 붉혔다. 실루엣이나 뒷모습만을 보았을 때는 누구인지 추측할 수 없었지만, 얼굴을 보니 금방 알아챌 수가 있었다. 공주잖아?&lt;br&gt;&amp;nbsp;&lt;br&gt;치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상대의 귓가는 더욱 달아오른다. 아무리 세상만사 관심 없는 것처럼 굴어도 교내 유명인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이름은 가물가물했지만 극을 올릴 때 항상 히로인 자리에 서는 학생이었다. 그건 상대가 나카에 치세 만만찮은 유명인이라는 의미였다. 지나치다 흘끗거리는 동급생들은 이제 떠나질 않고 둘을 둘러싸려 들었다. 원치도 않은 연극 무대에 선 기분이라 영 달갑잖았다. 여전히 웅얼거릴 뿐이지 제대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이에 치세는 선뜻 질문한다. 용건이 뭔데? 여학생은 마치 그 말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제껏 답답하게 군 게 누구냐는 듯 당돌하게 내뱉는다. 사귀어주세요!&lt;br&gt;유리의 왼팔을 독차지하는 여학생은 대부분 비슷했다. 평균보다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 그러나 성격은 모두 제각각이었는데, 이번 상대는 교내 가십에 관심이 많아도 지나치게 많은 타입인지라 사람이 다섯 이상 모여있는 곳은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 사람이었다. 체구가 아담한 여자친구는 대열 너머 사건의 근원지를 들여다보고 싶어 했지만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그 키로는 무리였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듯 둥글게 뜬 눈으로 남자친구를 바라보았으나 유리는 관여하지 않고 외면하고 만다. 소란스러운 일에는 애초부터 휘말리지 않는 게 정답이다. 그러나 무심코 고개를 추켰을 때, 군중 너머로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lt;br&gt;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건의 당사자는 한참 전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운명적인 눈 맞춤은 불가능하지 않나. 유리는 멍청하게 서 눈을 두어 번 깜박인다. 세로로 긴 나무토막 같은 몸. 그리고 조금 못되게 웃을 줄 아는 얼굴. 측근의 여자친구와 닮은 구석이 성별을 제한다면 단 하나도 없는 학생이 군중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여튼 못 알아볼 리 없는 얼굴이다. 치세는 상대를 붙들어 바로 세웠다. 덕분에 학생의 붉어진 귓가가 저 멀리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유리는 그 여학생이 누구인지 알았다. 연극부원인 여자친구의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큰 배역을 도맡고 있던 학생. 치세는 명찰을 가리고 있던 밀색의 머리카락을 걷어낸다. 익숙한 색의 명찰 하나가 달려 있었고, 치세와 유리는 동시에 발음한다.&lt;br&gt;유리百合.&lt;br&gt;&amp;nbsp;&lt;br&gt;수도 없이 발음해 보았던 이름인데 이상하리만큼 입에 달라붙질 않는다. 유리, 유리……. 처음 듣는 이름이라도 되는 듯 몇 번 되뇌어도 그랬다. 하여 치세는 발음하는 방법을 조금 바꿔보기로 결정한다. 유리는 설렘인지 긴장인지 모를 것 때문에 바들거리느라 알 수 없었겠지만, 치세의 시선은 당신이 아닌 멀리 선 남학생에게 가 있었다. 너, 유리ゆり였구나?&lt;br&gt;남들 보기에는 열렬한 유리의 구애에 그 지랄맞던 치세도 홀랑 넘어가 버렸다는 러브코메디식 전개로 보였겠지만, 실상은 첫 단추부터 삐걱거리기로는 둘째갈 데가 없었다. 애초부터가 애정은커녕 아무런 감정도 없는 연애가 오래갈 리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일방적인 애정 공세로 평탄하게 이어지던 관계는 이 주를 막 지나던 시점에 금이 갔다. 치세의 손을 누르듯 매만지던 유리는 묻는다.&lt;br&gt;있잖아, 너는 나랑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lt;br&gt;치세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고, 무얼 바라는지 대충은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유리에게 묻는 것보다 먼저 입을 맞추는 성의를 보였다. 유리는 분홍빛 손아귀로 치세의 뺨을 감싸고 아랫입술을 간질이듯 깨문다. 유리에게는 귀여운 비밀 하나가 있었는데, 그건 부끄러울 때 손가락 마디부터 붉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치세는 이때쯤 불유쾌한 자각이 든다. 유리百合는 유리ゆり와 털끝 하나도 닮지 않았다. 심지어는 성별마저도. 불현듯 상대를 떼어놓는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유리는 순순히 멀어지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lt;br&gt;&amp;nbsp;&lt;br&gt;너, 내 이름도 잘 모르지?&lt;br&gt;치세는 곧바로 응한다. 알아. 유리잖아. 그 대답에 더 울화가 치민 것처럼 고개를 바짝 쳐든다. 그게 아니라 성 말이야. 처음엔 살갑게 불러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 넌! 그럼에도 치세는 대답하지 못했다. 유리는 이제 히가시카 고교 남학생 중 절반을 홀렸다는 청초한 낯으로 악을 지르고 있었다. 어디에서 거절 한번 당해본 적 없을 테니 자존심에 상처가 날 법도 했다마는 정말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문득 발치에 동전 하나가 추락한다. 유리가 마구잡이로 던져댄 것 중 하나였는데, 가슴팍 어드매에 맞고 떨어진 모양이었다. 덕분에 아슬하게 매달렸던 플라스틱 명찰까지 바닥행을 못 면했다. 그는 제풀에 지쳐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치세는 그를 달랠 만큼 다정한 성정이 못 되어서 계속 발치만을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의 만남은 처음부터 불합리하고 백해무익하다. &lt;br&gt;백 엔도 아니고 십 엔짜리 동전이었다. 허리를 숙여 그걸 손에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던 건지 금속의 동전이 따뜻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와 함께 유리의 립스틱을 줍고 보니, 차게 식은 옥상 바닥에는 명찰 하나가 외로이 버려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쯤 위화감이 들었던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름이 조금 달랐다. 그 역시 유리ゆり였다.&lt;br&gt;&amp;nbsp;&lt;br&gt;&amp;nbsp;&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十円の呪い&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br&gt;나카에 일가와 모가미 일가의 유일한 공통점은 식사를 함께한다는 점이다. 특이점이 있다면 모가미 일가에서는 아침을, 나카에 일가에서는 저녁을 함께한다는 것 정도. 기이하게도 두 시간은 모두 동일했다. 나카에 하나코는 그들을 위해 항상 네 명분의 식사를 준비했다. 대부분 하나 혹은 두 자리가 비었지만, 유리만은 큰 일이 없다면 그 자리를 지키고자 했다. 몇 년이 지나면서 그 의미는 퇴색되어 저녁 식사는 하나코와 유리만의 약속이 되어갔다. 4인용 아일랜드 식탁의 가장자리에 앉아 조리대 너머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그건 꼭 종편 드라마에서나 보던 화목한 가정을 닮았다. 노력에 비해 일식에는 재능이 없던 하나코의 식사는 싱겁거나 소금기가 과했다. 오늘의 샐러드에서는 신맛이 심했다. 그러나 지적하지 않고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는다. 언제나처럼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보다 먹는 속도가 조금 느린 하나코는 오늘도 일찍 귀가하지 않는 치세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유리는 그게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lt;br&gt;그러면 제가 데려올게요.&lt;br&gt;겹친 식기를 든 채 의자를 밀고 일어선다. 허락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등을 보이는 일에는 도가 튼 건지도 모르겠다.&lt;br&gt;유리가 생각하기에 나카에 부인의 가장 큰 문제는 다 큰 자식을 너무 사랑한다는 거였다. 군식구에게 그릇 닦는 일조차 맡기지 않을 만큼. 이처럼 그 역시 부인의 사랑하는 자식 중 하나인지라 하나코는 유리의 희생-처럼 들렸던 제안-을 당연하게도 거절했지만 유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태 신맛이 감도는 입안을 헹굴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발치에는 주인이 분명한 담배꽁초가 몇 까치 쌓여있었다. 계절감 없이 불어오는 시린 바람이 매캐한 향취마저 앗아갈 게 분명했다. 겸사겸사 밀린 메일을 확인한다. 별로 성실한 답장을 하는 타입은 아니라 주고받는 메일주소들이 외울 정도로 익숙했다. 유리는 대부분의 메일을 읽고 넘겨버렸다. 답신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때쯤 발랄한 알람 소리가 울린다.&lt;br&gt;[지금 뭐 해?]&lt;br&gt;[보고 싶어(՞ . .՞)...♡]&lt;br&gt;이리도 애교 섞인 텍스트라니. 메일 주소를 확인하지 않아도 발신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유리는 네 개피째 불을 대려다 말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잠깐 밖이야]&lt;br&gt;[연습은 끝났어?]&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응 어두워서 무서워]&lt;br&gt;[｡･ﾟ꜀( ꜆&amp;gt;-&amp;lt; ̥)꜆ﾟ･｡]&lt;br&gt;다시 불을 붙이려는데 답신이 하던 일을 끝내기도 전에 돌아온다. 익숙한 어리광이다. 이번 축제에 올릴 극은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여자친구의 배역은 로렌스-애초에 성비가 로미오마저 여학생이 맡을 정도로 성비가 어긋난 동아리였던지라 유리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말았다-였다. 갈등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정신 나간 수도사 말이다. 하여튼 이 메일에 어떤 답을 주어야 할지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유리는 어느새 긴 손톱으로 폴더의 뒷판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유리百合 말인데, 잘 아는 사이야?]&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버튼을 누를 때마다 물고 있던 담배가 까딱거렸다. 보내려다가도 전송 버튼에 영 손이 가질 않는다. 짧은 고민 끝에 문장 자체를 삭제하고야 만다.&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큰길로 조심해서 들어가]&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남자친구 행세를 하는 문장은 가볍게 누르면 쏟아지는 자판기처럼 출력된다. 애초에 보냈어야 할 대답은 이게 옳았다. 유리는 그제야 담뱃불을 붙일 수 있었다.&lt;br&gt;[들어갈 때 전화해도 돼?]&lt;br&gt;응. 짧은 응답을 처리하던 유리는 복도 끄트머리의 센서등이 켜지는 것을 보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오래 앉아 있던 탓에 굽힌 채로 혹사당한 무릎 관절이 영 뻐근했다. 나카에 일가는 엘리베이터와 가장 먼 508호에 거주했고, 복도 천장에 낱낱이 깔린 센서등은 유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순서대로 불이 들어온다. 얼마 못 가 점등 행렬이 멎는다. 508호 몫의 센서등은 막 이사 오던 때부터 고장이 나 있었으므로 유리의 머리 위는 여전히 암흑이다. 발끝을 따라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이는 목전에 멈추어 선다. 유리의 휴대폰이 사정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랄하게 울고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의 전송 버튼을 눌렀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발치를 내려다보던 상대의 고개가 삐딱하게 오른다. 그는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유리는 그 얼굴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도 깨닫는다. 그리고 광대 어드메의 긁힌 자국과, 찢어진 건지 터진 건지 알 수 없게 딱지가 앉아버린 입술까지도. 양지에 있던 단화는 지적할 틈 하나를 주지 않고 새까만 어둠 속을 딛는다. 유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상대는 오만하게도 검지를 쳐든 채 내려쥔 폴더폰에 손가락질한다.&lt;br&gt;받지 그래?&lt;br&gt;동시에 휴대전화 사이드의 라이트가 반짝인다. 자정이 막 지나고 있었다.&lt;br&gt;얼굴이 엉망인데…….&lt;br&gt;한 대 맞았어.&lt;br&gt;치세는 유리를 달래지 않고 눈치 없이 동전과 소지품을 주워다 바친 대가로 왼쪽 뺨을 얻어맞았다. 백오십은 될까 말까 한 조그만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치세는 그걸로 유리의 첫키스에 대한 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다. 툭툭 끊어지는 말투로 뱉는 무용담을 흘려듣던 유리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원을 끈 것도 아니라 주머니 속에서도 진동을 반복했다. 그의 여자친구는 전화를 무시당하는 일을 끔찍하게도 싫어했고, 그 일로 가벼운 말다툼을 두어 번 겪은 적 있기에 그 역시 치세의 꼴을 못 면할 것이다. &lt;br&gt;전화 받지?&lt;br&gt;치세는 다시 한번 강권한다. 당신 뺨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소리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유리는 순순히 플립을 연다. 여보세요? 텍스트만치로 애교 섞인 목소리가 전파를 탄다. 유리는 여전히 휴대전화를 든 채로 치세를 바라본다. 반대편에서 응답이 없어 여자친구는 두어 번 더 목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 그는 아주 천천히 플립을 다시 닫았다. 전화가 끊어진다. 여자친구는 무조건 제가 원할 때, 먼저 전화를 끊어야 하는 공주님인지라, 유리의 처우는 보다 확실해지고야 말았다. 부지불식간 터진 입안이 아렸다. 피가 멎었을 게 분명한데도 쇠 맛이 났다. 치세는 유리가 주머니에 전화기를 밀어 넣는 것까지 지켜본 후에야 알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겨우 아문 여린 살을 깨물었던 모양이었다. 불만 때문이었다. 유리의 고백을 받아 섬긴 것도 나. 먼저 키스한 것도 나. 얼마 못 가 이별을 고한 것도 나. 기어이 얻어맞고 난 자리를 다시 깨문 것까지 전부 나카에 치세가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목전의 당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초 모가미가 나카에의 탈을 쓴 채로 삶에 치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lt;br&gt;그렇다면 아무런 일도 없지 않았겠는가?&lt;br&gt;나카에는 생각한다. 관여한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다른 이들의 착각과 별개로 감정에는 방향이 없다. 그렇기에 타이를 쥐어 당긴다. 말이 좋아야 타이를 쥐었다지 실상 멱을 쥔 것과 진배없는 움직임이다. 유리는 힘을 쓰지 않는 건지 못하는 건지 제가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한번을 반항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적당히 힘을 주어 당겼다. 예상대로 상대는 휘둘리듯 끌려온다. 면과 면이 지척에 오는 것도 한순간이다. 그럼에도 유리에게는 당황한 기색이 없어서 만족스럽진 못했다. 치세는 유리가 중심을 잡을 틈도 주질 않고 입을 맞춘다. 그것도 모자라 혀를 밀어 넣기까지 했다. 연인에게 하듯 다정한 스킨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키스가 아닌 건 아니었다. 치세는 요구하는 것보다 무언가 탐구하는 것처럼 굴었다. 한참을 복기하듯 파헤치던 누이는 동생이 숨이 차 어깨를 쥐었을 때 떨어져 주었다. 치세는 이 돌발 행위로써 아주 명료한 결론을 도출해 낸다. 생각보다 좆같지 않네? 유리와의 키스는 이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챌 만큼 별로였다마는. 그가 태우는 담배의 맛만큼 씁쓸한 자각이었다. 유리는 그제야 발화한다.&lt;br&gt;방금 뭐 한 거야?&lt;br&gt;뇌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다. 치세는 걸치고 있던 자켓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가슴팍에는 익숙한 이름中江 ゆり이 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lt;br&gt;네가 알 게 뭐야.&lt;br&gt;모가미는 생각했다. 아니, 나카에는 생각한다……. 책임을 지기에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선택권이 없지 않았느냐고. 그는 얌전히 살고 싶다. 나카에의 부모에게 겉보기만은 건실한 아들이 되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쓸쓸한 장례를 기약하고야 만다. 치세는 복잡한 심경을 내보인 게 언제냐는 듯 후련한 얼굴로 복도의 아주 끄트머리에 침을 뱉었다. 마치 부정한 것을 토해낸 후 입을 헹구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그는 세 번 실패했지만, 유리를 유기한 채 귀가하는 데 성공한다. 동요보다는 이제야 긴장이 풀린 것만 같았다.&lt;br&gt;홀로 선 유리는 주머니 속을 구르는 코인을 쥔다. 치세가 모나게 굴어도 잘 돌봐줘. 네가 오빠잖아. 사이좋은 남매를 바라던 하나코의 면면이 감긴 망막 너머 선명하다. 글쎄요, 어머니. 그 애는 내가 처음 오던 날부터 오빠 취급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그때 뱉지 못했던 말이 여전히 목에 걸려 있었다. 코인을 사찰에서처럼 허공에 퉁겼다. 단풍이 보이는 날이면 불운이 유리의 뒤축을 따라 오르고는 했다. 유리는 그때부터 손등 위로 추락한 동전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알겠지만 우리의 만남은 백해무익하다. 하여 양친에게는 정말 죄송한 소식이다마는, 말마따나 관여한 모두가 책임을 져야 했다. 내가 순진한 체 아버지의 죄상을 고백했을 때부터. 나카에 료타가 자판기에 십 엔을 밀어 넣었을 때부터. 나카에 하나코가 식탁에 수저 한 벌을 늘렸을 때부터. 유일한 자식인 나카에 치세가 기어코 굴러온 돌에 입 맞추는 사고를 범했을 때부터……. &lt;br&gt;가슴께까지 오는 콘크리트 난간 너머로 코인을 유기한다.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유리는 전화를 받지 않고 열쇠를 밀어 넣는다. 치세와 달리 단번에 넣어 돌리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은 족히 들어갈 만큼 활짝 열어젖히면 현관의 노란 빛이 어두웠던 사위를 감싼다. 다녀왔습니다. 중얼거리듯 건넨 인사에도 하나코는 반갑게 맞는다. 직후 문이 닫혔다. 회고하건대, 나에게 종편 드라마에 나올 법한 가정을 꾸리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건지도 모른다.&lt;br&gt;&amp;nbsp;&lt;br&gt;&amp;nbsp;&lt;br&gt;&amp;nbsp;&lt;br&gt;&amp;nbsp;&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계속해보겠습니다&lt;br&gt;*途上 谷崎潤一郎&lt;/p&gt;</description>
      <author>짼젤</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chae-back.tistory.com/5</guid>
      <comments>https://chae-back.tistory.com/5#entry5comment</comments>
      <pubDate>Thu, 20 Nov 2025 05:29:06 +0900</pubDate>
    </item>
    <item>
      <title>RESERVOIR DOGS</title>
      <link>https://chae-back.tistory.com/4</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상상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단순히 목전에 두지 않은 물체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본질적인 심상 말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감각 체계를 타고 들어오는 외부 자극을 차단하다 보면 대면할 수 있는 무의식의 밑바닥. 불안과 걱정은 그곳에서부터 온다. 이를테면 꿈이다. 예지몽이나 선견지명 따위의 신뢰성을 떠나 부지불식간 직면하게 되는 비현실은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매 그저 순응하고, 일말의 현실감이 없는 판타지라고 믿은 채 의식 깊숙이 파묻은 기억이 아니기만을 바라야 한다. 그러니 티모시가 무던히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건, 대단히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는 일 년에 꾼 꿈을 양손으로 전부 셀 수 있을 만큼 공상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꿈을 꾸더라도 따분한 과거 회상에 불과했다. 학창 시절의 기억이라거나, 한참을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 나쁘지 않은 추억들……. 고이 썩어가는 나쁜 추억은 전부 무덤에 묻었으니 티모시는 잠을 두려워하는 부류가 아니었다.&lt;br&gt;&amp;nbsp;&lt;br&gt;조금 로맨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근래 티모시는 나카에의 꿈을 꾸었다. 하루이틀간의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주일 내도록 말이다. 배경이 뒤틀려도 이 무대에 둘을 제외한 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인지하지 못한 건지도 모르지만 꿈속에서의 티모시에게 그따위 걸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꿈의 장르가 코메디나 드라마였다면 아주 기꺼워 춤을 추겠고 차라리 로맨스 정도만 되었더라도 이리 고달프지 않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무의식 속 티모시가 선택한 건 가끔 아날로그 호러이며 슬래셔고 미스터리 서스펜스에 대부분 스릴러다. 그곳에서 나카에가 맡은 역할은 높은 확률로 미치광이였고 티모시의 배역은 가련한 피해자거나 미련한 방관자였다.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러도, 자신을 동정해도 어쩔 수 없다. 꿈은 주인의 무의식을 대변하기 마련이니까.&lt;br&gt;그러니까, 이 모든 건 어디에서 진창 구른 건지 먼지투성이가 된 나카에를 목격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lt;br&gt;일회용 랩을 주방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버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동거인의 귀가가 늦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어서 새벽 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도 전화 한 번 걸어볼 생각을 못 했다. 쓰레기 위로 조각난 손톱이 추락한다. 손가락을 다치지 않아 다행이지, 칼을 쥐다가 손톱을 베는 건 부상의 축에도 못 끼었다. 덕분에 정돈할 틈도 생겼으니 잘된 일이지. 펜을 달칵거렸다. 노란 포스트잇에 정돈된 영어가 적혔다. 반쪽은 아침에, 남은 건 도시락으로. 랩으로 감싼 접시 위에 쪽지를 붙이던 중 아주 느리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백한 얼굴로 문을 연 나카에는 신발도 다 벗지 못하고 쓰러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다 온 건지 멀쩡하던 옷은 의문의 액체로 얼룩져 있었고 다 헝클어진 머리칼에도 불순물이 묻어 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빗 삼아 그의 머리를 빗어주었다. 손길을 따라 먼지가 덩어리져 떨어졌다. 일으켜 세우진 못할망정 똑같이 현관에 자리 잡고 앉은 꼴이 꽤 웃겼다. 바깥에서 이질적인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다.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 노크 소리였다.&lt;br&gt;&amp;nbsp;&lt;br&gt;나야. 문 열어.&lt;br&gt;관성적으로 움직이던 손길이 멎었다. 복도에 소리가 새지 않도록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마치 나카에가 비밀번호를 누르던 것처럼 신중히. 바깥에서는 여전히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티모시. 손을 다치는 바람에 잠금이 잘 안 풀려. 그러니까 문 좀 열어. 거기 있잖아. 그의 목소리는 점차 격양되었고 종국에는 문짝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발치에 잠든 나카에를 내려다본다. 옆집의 성질 더러운 놈이 문을 박차고 나올 때가 되었는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상황을 나 대신 해결해 줄 사람은 없다. 나는 작게 난 문구멍 너머를 들여다 보았다. 내게는 바깥에서 문을 긁어대는 이가 진정 나카에인지, 혹은 불청객인지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밖을 바라본 순간 까무러쳤고, 침대에서 눈을 떴다. 묘하게 부어오른 후두부를 문지르며 기분 나쁜 꿈이라고만 생각했다.&lt;br&gt;악몽은 구체적으로 반복된다. 어느 날에는 쓰러지기 직전인 모텔 카운터 직원이 되어 살해 및 시체 처리 현장을 감시카메라로 들여다보았고, 또 다른 날에는 한 끗 차이로 손도끼를 든 채 피칠갑-남의 것인지 나카에의 것인지 티모시는 알 수 없었다-을 한 나카에를 피해 욕실에 틀어박히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일평생 배우를 꿈꾼 적도 없는데 꼭 스탠리 큐브릭 장편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티모시는 그날부로 모든 영상매체를 끊었다.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일본 드라마는 조금씩 귀가 트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더 이상 티모시의 도피처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가 일방이건 양방이건 교류 자체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티모시가 홀로 남은 일과 시간은 더없이 정적이었다. 그는 사소한 생활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 읽지도 못하는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간을 보내거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다. 덜미를 문지를 때 어느새 길어진 뒷머리가 손에 닿았다. 외출하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카에가 없는 집안은 이토록 삭막했다.&lt;br&gt;&amp;nbsp;&lt;br&gt;이변 없이 새벽 세 시에 터져 나오는 소리를 겨우 억누르며 눈을 떴다. 양손을 각각 소파 팔걸이에 나누어 묶인 채 세뇌를 당했다. 언제는 아니었냐마는 이번에야말로 살해당하기 직전이었다. 진정 식은땀으로 젖은 등판이 축축했다. 티모시는 그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페이크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나카에의 스너프 필름을 돌려보는 일에는 꽤 심한 정신적 소모가 동반되었다. 언젠가부터 눈을 감기만 해도 귓속에서는 신경질적인 노크 소리가 들렸고 문구멍 너머로 마주친 심연 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내용이 어찌 되었든 악몽은 언제나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덕분에 그의 신경쇠약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수면 시간은 짧아지다 못해 쇼트 슬리퍼를 능가할 수준이 되었다. 그런 몸이 신체를 잘 받쳐줄지가 의문이라 반쯤 세면대에 기대어 선 채 희게 질린 얼굴로 힘없이 칫솔질하는 티모시를 목격한 나카에는 가볍게 비웃었다.&lt;br&gt;&amp;nbsp;&lt;br&gt;안 그래도 창백한데 거의 시체가 됐네.&lt;br&gt;그래. 덕분에…….&lt;br&gt;&amp;nbsp;&lt;br&gt;웅얼거리는 소리에 양칫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현실 구분이라도 할 줄 아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적어도 역으로 동거인을 결박하고 안정을 찾을 일은 없었으니까.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두꺼운 외투를 걸치던 나카에는 티모시의 아래턱을 쥐어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마른 손에도 박하 향 거품이 묻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반항하지 않는 태도는 물론이고 그나마 부드럽던 피부는 순식간에 생기를 잃어 거칠어졌으며 다크서클은 광대까지 내려왔다. 이건 뭐 어디 아픈 애처럼……. 나카에는 수면 부족으로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운명처럼 둘의 눈이 마주친다. 평소에도 아주 맑다고는 할 수 없었겠지만 의료 지식이 전무한 나카에가 보아도 티모시의 눈은 뭐에 홀린 듯 혼탁했다. 그는 만족할 만큼 들여다보고서야 티모시를 놓아주었다.&lt;br&gt;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병원 가라…….&lt;br&gt;&amp;nbsp;&lt;br&gt;티모시는 저도 모르게 꽤 힘이 들어갔던 건지 나카에의 손자국이 남은 피부 가죽을 문질렀다. 나 보험증이 없는데. 그의 대답에 나카에는 숨기지 않고 혀를 찬다. 그런 건 또 어디서 주워 들어서는……. 그럼 그렇게 병자처럼 살던가. 여전히 세면대를 등진 채 우두커니 선 티모시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카에는 그의 응답을 기다려줄 생각도 없던 사람처럼 신발을 고쳐 신은 후 외출했다. 무슨 바람이 든 건지 평소보다 두 시간은 일찍 퇴근한 나카에의 손에 보험증 하나가 들려있던 건 티모시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티모시의 한텐 주머니에 위조품을 욱여넣으며 소매의 짓이겨진 자국을 응시했다. 불로 지져진 흔적이었다. 남의 옷 빼앗아 입은 것 같았는데 이젠 네 옷 같네. 티모시는 소매를 더듬어 흔적을 되짚었다. 그거 이제 이 나라 사람처럼 보인다는 뜻인가? 상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고 병원이나 가 봐…….&lt;br&gt;&amp;nbsp;&lt;br&gt;한 손에 담배를 든 채로 보험증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한낮의 햇빛이 그 위를 노랗게 비추었다. 여권에 신분증을 잇는 보험증. 이제 유리ゆり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세 종류가 되었다. 여전히 어색하지만 한 사람이 겨우 불러주는 이름보다 이게 진짜 이름처럼 느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증서를 향해 아래쪽에서 작은 손 하나가 뻗어 나왔다. 나도 보여줘. 나도 구경할래. 카노의 목소리였다. 그는 작은 움직임으로 보험증을 건넨다. 둘 사이에는 여전히 통역이 필요했지만, 짧은 대화 정도는 서로 뉘앙스로 알아들었다. 어차피 숨길 필요도 없는 증명이었다. 티모시는 자신을 따라 하듯 부산스레 움직이는 고사리손을 좌시하며 차근히 주변의 종합병원이나 정신의학과 위치를 복기했다. 현대 의학의 힘을 빌리는 게 멍청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특히 이런 사정은 초기에 잡는 게 중요했다. 떨어뜨리지 마. 카노는 주의를 주자 그제야 보험증을 바로 들고 천천히 글씨를 읽어나간다. 학교도 안 다니는 애가 술술 읽어내리는 모습이 퍽 신기했다. 까막눈 친구인 줄 알았더니 실망이네. 티모시의 중얼거림에 문득 고개를 든다. 알아듣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카노는 무어라 말을 붙였지만 티모시 역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기어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lt;br&gt;성이 엄청 흔하다구. 사토는 우리 맨션에도 다섯 명이나 살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유리라고 부르게…….&lt;br&gt;&amp;nbsp;&lt;br&gt;사토? 나카에가 아니라?&lt;br&gt;나카에?&lt;br&gt;영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이 어린애는 거짓말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 정말 처음 듣는 게 분명했다. 의미가 분명한 티모시의 손짓에 카노는 순순히 보험증을 돌려놓는다. 증서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아도 무슨 글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일곱 살짜리도 아는 한자 두 개인데.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연기가 샌다. 왜 한 번도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lt;br&gt;짧게 타들어 간 담뱃불이 검지 끝을 간질이는 감각에 정신이 되돌아온다. 통증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불이 꺼진 꽁초는 맨션 아래로 추락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유는 간결하다. 친히 이름을 붙여주신 이에 대한 신뢰 때문이겠지. 새삼스럽지만 이 섬에서 티모시가 능숙히 소통할 수 있는 상대는 그뿐이다. 티모시는 호기심으로 둥글게 뜨인 카노의 눈을 보았지만 그저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주고 만다. 고마워. 추우니까 이제 들어가. 카노는 티모시의 짧은 일본어를 꽤 좋아했다. 모든 의문을 품고 제집으로 돌아가 줄 만큼. 베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lt;br&gt;&amp;nbsp;&lt;br&gt;&amp;nbsp;&lt;br&gt;RESERVOIR DOGS&lt;br&gt;&amp;nbsp;&lt;br&gt;가끔은 말이지,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그 순간 하나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지금까지의 악몽은 예고에 불과했던 걸까? 아주 낮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핏물을 보며 아득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이어서 두꺼운 현관문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크기에서 무게감을 추정하자니 누군가 제 몸을 지탱하다 못해 무너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특정하자면 내가 아주 잘 아는 성인 여성 정도의……. 얇게 깔린 핏물이 현관 바닥을 절반 이상 덮을 때쯤 티모시는 기대고 있던 벽면에서 몸을 떼었다. 바깥에 있는 이의 정체보다 이 참상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작게 난 문구멍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좁은 시야에는 반대편 벽에 비추어 보였을 뿐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 정도 출혈이라면 잘 쳐줘도 기절이다. 그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어느날처럼 한숨을 몰아쉰 티모시는 조금 홀가분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으나 잘 열리지 않았다. 힘을 주어 밀자 천천히 열린 문 사이로 무언가 추락한다. 그건 그가 아주 잘 아는 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lt;br&gt;나카에는 당신 덕분에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내를 알긴 하는 건지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버려져 있었다. 다른 고상한 표현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티모시의 시선에는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일 뿐이었다. 길게 눈을 감는다. 근래 학습한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아주 평화로운 삶을 살아온 건 아니었지만 이토록 지난한 삶은 이번 달이 처음이다. 그는 이 상황이 꿈일 가능성에 대해 점쳤다. 나는 나카에의 귀가를 기다리며 담배 세 대를 피운다. 카노와의 대화를 마친 후 재떨이를 비우고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피로에 베란다 문턱을 채 넘지 못하고 잠이 든다. 잘못 기울어져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생긴 인지 왜곡으로 또 황당무계한 꿈을 꾸는 거다. 그래……. 이건 상상이다. 근래 있던 정신 나간 나날이 내 뇌리를 헤집어놓은 게 분명하다.&lt;br&gt;정신을 다잡은 후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작금의 상황을 마주하자 그제야 피가 식었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미묘하게 더 커진 피웅덩이 뿐이었다. 문이 열리며 측면으로 쓰러진 몸체를 정자세로 되돌렸다. 웃옷의 팔 부분이 크게 찢어져 환부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가워진 손끝으로 늘어진 손목을 쥐어 맥을 짚는 겸 상처를 확인한다. 잘 벼린 날붙이로 각친 절상이다. 죽으라고 벤 게 아닌 모양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저 경고에 불과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부상이 깊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카에의 허리춤을 감싸안고 천천히 자세를 세웠다. 티모시가 그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한 채 집안에 들여 욕조에 집어넣는 것에만 자그마치 십오 분이 걸렸다. 피와 식은땀에 젖은 자켓과 셔츠를 벗겨내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동시에 아래에 쏟아진 흔적들을 정리할 생각에 벌써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티모시는 팔뚝을 비롯한 살갗에 묻은 자국을 닦아내며 품이 큰 후드집업 하나를 걸쳤다. 이 열악한 환경에서 수혈까지는 무리다. 뇌 내서 수많은 약물과 기자재의 명칭이 뒤엉겼다. 하여간 바다너머에서도 사람을 가만히 두질 못하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 서로에게는.&lt;br&gt;&amp;nbsp;&lt;br&gt;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알아챈 건 가까운 곳의 인기척이다. 그러나 감긴 눈을 뜨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우선 생리적인 눈물이 속눈썹에 엉겨 붙어 그대로 굳는 바람에 깜빡이려 해도 아주 조금밖에 눈꺼풀이 들리지 않았으며 겨우 눈을 뜨고서도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백열등에 눈을 한껏 찌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빛에 적응하느라 애쓰고 나서야 아둔한 시야가 넓어졌다. 정확히 일 미터 정도. 그 정도로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건 무리였다. 애초에 머릿속이 와인과 바카디 그리고 맥주를 진탕 퍼붓고 난 다음날처럼 필름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보아하니 정말 과음인지도 몰랐다. 나카에는 애써 고개를 돌렸고, 그 자리에는 제 팔뚝에 그야말로 고개를 처박은 티모시만이 존재했다. 불편하지도 않은지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그는 여전히 일본의 좌식 문화에 적응 하지 못했다 불행하게도-로 말이다. 새카만 머리통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미묘하게 흔들렸다. 나카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lt;br&gt;&amp;nbsp;&lt;br&gt;너 머리숱이 많네…….&lt;br&gt;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에 목구멍 너머로 갈라진 소리가 빠져나왔다. 그는 이제야 나카에가 정신을 차렸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금 경직되었다가 다시금 행위를 재개했다. 그가 무얼 하는지 몰라도 뻐근한 팔을 가져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카에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을 알아챈 티모시는 안 그래도 움츠린 상체를 더 웅크려 시야를 제한했다. 보지 마. 포기하지 않고 각도를 바꾸어가며 드미는 고개를 완력으로 밀어내고 나서야 나카에는 포기했다.&lt;br&gt;왜 못 보게 한담.&lt;br&gt;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好奇心が猫を殺すんだ. 몰라?&lt;br&gt;나카에는 무거운 숨을 뱉었다. 티모시의 일본어는 보통 단어를 이어 붙인 조립식이었고 아주 가끔씩 온전한 문장을 구사하고는 했는데,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바와 달리 언제나 구어체였다. 텔레비전을 가져다 버리던지 해야지…….&lt;br&gt;&amp;nbsp;&lt;br&gt;숙련된 목수는 재료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글쎄. 작금의 나는 숙련된 수술의가 아니므로 좋은 재료와 파트너가 있다면 지체없이 그걸 택할 것이다. 나카에의 움직임에 벌어진 상처는 원시적으로 지지거나 몇 바늘 정도 꿰매야 출혈이 완전히 멎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꿈에 나올 것처럼 호러틱했지만, 질색하기에 티모시는 너무나도 많은 사연을 겪었다. 베인 상처를 이고 지고 병원이 아닌 집으로 돌아온 미련한 환자와 의학에서 손을 뗀 지가 꽤 된 비운의 의료인 뿐인 비극적인 봉합 과정에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내가 위치를 알고 있는 드럭스토어 내에서 프롤린 실과 괜찮은 사이즈의 봉합침을 판매했다는 것이매 외출한 시간 동안 환자가 혈액 부족으로 쇼크 증세를 보이지 않았고 학부 시절에도 자잘한 사고를 치고는 했던 의사가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lt;br&gt;깨어난 나카에는 다시 잠들지 않고 몸을 움직였으며-작은 움직임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처럼- 소소한 잡담을 진행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아직 정신이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라 다시 잠재우고 싶었지만 마취 크림도 아니고 제대로 된 의료용 마취제 따위 화타의 탈을 쓴 일반인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욕조 끄트머리에 아슬하게 걸친 나카에의 발끝이 달싹였다. 감각이 둔감하게나마 자리를 찾으며 알아챈 사실인데, 신나는 팝송이 티모시의 휴대전화에서 꽤 큰 볼륨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영화관에서 들은 적이 있던 익숙한 음악이었다. 바깥이 시꺼먼 걸 보아하니 아주 늦은 시간임이 자명한데 여러모로 에티켓이라고는 개나 준 작태였다. 티모시는 귓가를 파고드는 음악이 거슬리지도 않는지 리듬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템포에 맞추어 손을 움직였다. 나카에는 최대한 그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노래를 왜 틀어놔?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으나 티모시의 경고에 장단을 맞춰주려는 심산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를 떠나서라도 제 수술 장면을 모두 눈에 담으려는 악취미는 없었다. 별로 관심이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이런 건.&lt;br&gt;티모시는 다음 바늘을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찔러넣으면 좋을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손가락을 대어 치수를 재듯 말이다. 목소리는 심드렁하다.&lt;br&gt;&amp;nbsp;&lt;br&gt;만약 네가 소리 질러도 파티처럼 보이게 하려고.&lt;br&gt;너 사실 사이코패스지?&lt;br&gt;말 좀 그만 걸어…….&lt;br&gt;날카로운 바늘이 다시 한번 살갗을 파고들었다. 나카에가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팔이 가볍게 떨렸다.&lt;br&gt;좀 살살해. 억하심정 있냐.&lt;br&gt;그래서, 이겼어?&lt;br&gt;하하……. 겨우 묻는다는 게 이런 거?&lt;br&gt;&amp;nbsp;&lt;br&gt;아무래도 티모시는 나카에를 다시 재우는 것보다 그가 봉합 도중 기절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 나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 역시 이 세상은 이기지 않는다면 파멸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대답 역시 알고 있겠지만……. 궁금한 거지? 걔를 만난 건지, 내가 끝을 본 건지가……. 나카에는 욕조에 깊게 머리를 묻었다. 동시에 팔이 조금 끌려 올라갔으나 티모시는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내게 린치를 가한 이의 최후를 듣는다고 무언가 달라질까. 리벤지의 탈을 쓴 사적 제재가 이루어진 후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카에는 조금 다른 답을 내놓았다. 애석하게도 오늘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고.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길지 않다. 나카에의 말이 끊어지고 적막이 찾아온다. 익숙한 적막이다. 티모시는 손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그가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해 연설했다. 음주와 폭력을 비롯한 오른팔 사용은 가급적으로 금지. 찬장에 식염수와 소독제를 구비해두었으니 귀찮더라도 드레싱을 잊지 말 것. 그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어서 노랫소리와 괴리를 이루었다.&lt;br&gt;&amp;nbsp;&lt;br&gt;그리고……, 병원에 가.&lt;br&gt;그 정도의 일인가……. 그보다 보험증이 없거든.&lt;br&gt;티모시는 어느 날의 여자처럼 혀를 찬다. 그건 누군가를 모사하는 것처럼, 때로는 연기처럼 보였다. 그는 보험증을 딱 한 번 사용했다.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았지만 그건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지. 정신적인 문제라는 게 다 그랬다.&lt;br&gt;네가 준 가짜 학력도 보험증도 다 너 가져. 이제 사토라는 이름은 네 거야.&lt;br&gt;별로 마음에 안 들었나 봐?&lt;br&gt;나카에는 사토를 언급하는 티모시를 보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자세를 고쳐 앉았다. 봉합한 부분이 어긋날까 신경 쓰는 건 티모시 뿐이었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오래 몰랐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lt;br&gt;그럼 네 신분은.&lt;br&gt;티모시는 나카에의 추락한 오른손을 펼쳐 들었다. 피로에 새끼손가락이 아직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반사에 가까운 반응이므로 오히려 신경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울퉁불퉁한 손금에 잘 다듬은 손톱이 스쳤다.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은 손바닥 위로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진다. &lt;br&gt;나な.&lt;br&gt;히라가나구나.&lt;br&gt;카か.&lt;br&gt;제법 잘 쓰네?&lt;br&gt;에え.&lt;br&gt;하하…….&lt;br&gt;아무리 당신에게 내다 버렸다지만 그따위 걸 고이 주워다 쓰겠다는 마음을 나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지. 미련 없이 손을 올린 티모시는 마지막 매듭을 짓는다. 하지만 유리는 내 거야. 카노가 그렇게 부르고 싶대. 나카에는 간지러운 손을 말아쥐었다. 드러난 피스트가 까져 있었다. 폭력의 흔적이다.&lt;br&gt;그게 누군데?&lt;br&gt;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야.&lt;br&gt;뭐? 나는 뭔데.&lt;br&gt;네가 친구는 아니지……. 멀쩡한 왼손이 뒤통수에 날아들었다. 깜빡하면 욕조에 이마를 부딪칠 뻔하여 잠이 다 깨는 기분이었다. 그는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대화 도중 나카에의 정신이 몇 번이고 깜박였는데, 봉합을 마친 티모시는 충실하게 그의 옆을 지키는 대신 배어 나오는 피를 닦는 데 사용한 거즈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도피 생활에도 제대로 된 신변 정리를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lt;br&gt;&amp;nbsp;&lt;br&gt;&amp;nbsp;&lt;br&gt;レザボア・ドッグス&lt;br&gt;&amp;nbsp;&lt;br&gt;시간은 느긋하게 그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티모시가 손바닥 쪽이 찢어진 일회용 니트릴 장갑을 세 짝째 내다 버렸을 때 나카에는 다시 눈을 떴다. 가물한 시야 너머로 벽면에 난 조그만 창문에서 붉은빛이 새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lt;br&gt;너 거의 밤 샜다.&lt;br&gt;그래. 덕분에…….&lt;br&gt;피곤함에 절어버린 눈이 힘겹게 깜박였다. 긴장과 피로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티모시는 타일 바닥에 늘어진 것-나카에가 정확한 명칭을 댈 수 있는 건 가위와 붕대 또는 거즈뿐이었다-들 중 알약 세 알을 분리했다. 고개만 들어. 나카에는 순순히 머리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약물이 추락하고 생명수와 같은 물을 들이켰다. 무슨 약인데. 티모시는 환자의 궁금증을 제대로 해결할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지도 못하는 이름을 몇 가지 대었다.&lt;br&gt;그는 나카에가 자신을 뻔히 내려다보고 아무런 응답도 하질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파란 건 항생제고 흰색은 수면유도제. 이제는 잠이 오다 못해 귀찮았다.&lt;br&gt;진통제는 아까 먹였고…….&lt;br&gt;의식도 없는 사람한테 약을 어떻게 먹인 건데?&lt;br&gt;…….&lt;br&gt;티모시의 시선에 걸린 나카에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lt;br&gt;웃지 마. 상처 터진다고.&lt;br&gt;아, 알겠다고…….&lt;br&gt;안주인이라고 이제 바가지를 다 긁네奥さんだからって小言を言うんだね. 그가 일부러 일본어로 중얼거리는 말의 발음을 곱씹었다. 그대로 외워서 카노에게라도 물을 생각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하는 머리꼭지를 응시하며 가볍게 검지로 그 위를 퉁겼다. 괜히 움직였더니 아물기까지 열흘은 더 걸릴 팔뚝에서부터 통증이 올라온다. 티모시는 자신이 뇌까리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아버렸다. 정좌하던 자세는 점점 불량해져 거의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문득 코끝에서 독한 화학 약품의 냄새가 감돌았다. 오랜 비행 생활에서 추측하건대 이건 락스의 냄새다. 티모시의 손끝이 벗겨진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욕조에서 일어난 나카에는 그의 허리춤을 감싸안고 천천히 일으켰다. 의식적으로 한쪽 팔을 사용하지 않으려니 그 몸체 하나 옮기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하고야 말았다. 흰 시트 위로 차마 다 닦아내지 못한 핏가루가 추락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티모시는 당신 덕분에 고생하는 환자의 모습을 알긴 하는 건지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하여간 사람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 서로에게는.&lt;br&gt;&amp;nbsp;&lt;br&gt;&amp;nbsp;&lt;/p&gt;&lt;p data-ke-size=&quot;size16&quot; style=&quot;text-align: right;&quot;&gt;*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lt;/p&gt;</description>
      <author>짼젤</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chae-back.tistory.com/4</guid>
      <comments>https://chae-back.tistory.com/4#entry4comment</comments>
      <pubDate>Thu, 20 Nov 2025 05:28:12 +0900</pubDate>
    </item>
    <item>
      <title>札幌の眠れない夜</title>
      <link>https://chae-back.tistory.com/3</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사람들은 신발 밑창을 다 적실 정도로 눈이 내리는 홋카이도를 아름다움의 상징 정도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처음 하루는 아름답다. 여행의 둘쨋날도 셋째 날도 쏟아지는 눈에 파묻힌 채 행복을 나눌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흘이 다 되어가고 되돌아갈 날이 다가오는데도 그칠 기미가 없는 폭설에 긴장하게 되는 거였다. 비행만큼 기상 상황에 자주 휘둘리는 교통편이 없었다. 폭설이야 매년 있는 일이라 지역 대부분에 방비가 잘 되어 주민들이야 지붕이 무너진다거나 갈 곳을 잃을 일은 없었지만 거주하는 이가 아닌 여행객들에게는 천재지변이었다. 그들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는지 공항의 통유리 벽면에 흰 눈밭이 반사되어 아름답게 산란했다. 건조한 내부에 뻐근해진 눈가를 문지르니 마치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신치토세 공항은 이미 설국에 파묻혀 있었다.&lt;br&gt;&amp;nbsp;&lt;br&gt;티모시는 나카에가 얇은 유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채 항공사 직원과 실랑이하는 모습을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응시한다. 조금 격양되어 점점 빨라지는 일본어는 도무지 알아들을 게 못 됐다. 그 역시 현지인과의 소통에 도전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제대로 대화가 이어진 횟수는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었다.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기에 여행 내도록 특유의 영어 발음에 시달린 티모시는 어느 순간부터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나카에를 통해 진행하고는 했다. 나카에의 손끝이 신경질적으로 데스크 위를 검지로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그래서 비행기가 언제쯤 뜰 수 있다는 겁니까? 정말 죄송한 이야기지만, 그건 기상 상황이 좋아지면 방송을 통하여 안내해 드릴 것 같습니다……. 어깨 너머로 보이는 직원의 얼굴이 다소 곤란해 보였지만, 고객이 위로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나카에를 흘끔 바라본 그는 여권 사이 끼워진 비행 티켓을 꺼내어 이륙 시간 위로 취소 선을 그었다. 그 아래에는 새로운 시간이 분 단위까지 쓰였다. 일전 말했던 것처럼 정확한 시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날카로운 인상을 보아하니 그가 마치, 당장이라도 여권을 집어던지고 상급자를 호출할 것만 같아서…….&lt;br&gt;&amp;nbsp;&lt;br&gt;열한 시 십칠 분에서 두 시 이십 분. 네 시 삼십 분. 일곱 시 삽십칠 분……. 그와 비슷한 일이 세 번쯤 반복되었을 때 나카에는 정말로 여권을 바닥에 집어 던졌고, 티모시는 긴 몸을 한껏 웅크리고 앉아 그걸 주웠다. 몇 번이고 연착된 비행편이 더 밀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데다 다른 스케줄을 예약하기엔 쌓인 눈 탓에 멀쩡히 운행하는 비행편 자체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 전만 해도 이러다 못 돌아가는 게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지만 그게 현실이 될 줄이야. 기념일을 맞아 당일치기 여행을 떠났지만 폭우로 인해 섬에 갇힌 커플이 된 기분이었다. 하도 수정을 해 펜 자국이 번진 티켓을 문질렀다. 그리고 그들은 겨우 방 하나를 넘겨받겠지. 티모시는 일어서지 않고 나카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분을 삭이느라 시린 벽면에서 떨어지지를 못했다.&lt;br&gt;많은 사람들이 공항 구석마다 소박한 짐을 펼치고 밤을 새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 다 자란 성인들이 삼삼오오 뭉친 꼴이 꽤 우스워 보였으나 최종적으로 익일 오후 한 시 일정을 받은 둘 역시 비슷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짐을 부치지 않았다는 거 하나겠다. 그제야 제 꼴이 와닿았다. 눈밭에서 질질 끌렸던 캐리어의 하단부는 티 나게 더러웠고 그건 삿포로 일정에 함께했던 부츠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들만 상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티모시의 코트는 쌓인 눈을 아무리 털어도 어디에선가 자꾸 눈송이가 떨어져 축축해진 지 오래였고 나카에의 부스스한 머리칼은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lt;br&gt;&amp;nbsp;&lt;br&gt;나카에…….&lt;br&gt;티모시는 놀이공원에 버려진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나카에의 코트 끝자락을 쥐었다. 같은 눈을 맞았는데도 이이의 코트는 어쩜 이리 보드라운지가 의문이었다.&lt;br&gt;왜?&lt;br&gt;돌아오는 성음이 꽤 신경질적이었다. 그러나 티모시는 개의치 않았다.&lt;br&gt;나 추워.&lt;br&gt;&amp;nbsp;&lt;br&gt;추위를 알아채고부터 고질병인 귀찮음이 도진 건지 축적된 피로를 깨달은 건지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려는 티모시의 팔을 당겨 일으켜 공항을 나섰다. 다른 이들처럼 하루 정도야 공항에서 밤을 보내도 괜찮겠지만,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니 어딘가에서 씻고 옷이라도 말려야 했다. 애초에 여분의 겉옷 없이 코트 한 장씩만 덜렁 입고 여행을 떠난 이들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거리 한가득 쌓인 눈밭 위를 딛는 걸음이 신중했다. 직원의 핑계라고만 생각했는데 몇 시간 사이 정말 눈이 많이 내리기는 했는지 전보다 발이 깊숙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동행에 목적지가 없어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lt;br&gt;나카에는 큰 사이즈의 캐리어를 끌면서 불편하지도 않은지 나머지 한 손으로는 여전히 티모시의 팔뚝을 쥔 채 걸었는데 그건 자신보다 걸음이 느린 티모시가 뒤처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종의 미아 방지였고, 그를 아무리 종용해 봐야 잘 들어먹지를 않아 이 방식이 가장 성질에 맞았다. 관광지도 아닌 동네를 한참 둘러보며 걷던 티모시는 어느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길바닥에서만큼은 운명 공동체를 자처하던 나카에 역시 덩달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관리가 잘되지 않는지 입구에는 철 지난 할인 전단이 달랑 붙어 있었고, 그는 편의점에 못으로 고정된 간판 하나를 가리켰다. 조금 바랬지만 익숙한 심볼이었다.&lt;br&gt;&amp;nbsp;&lt;br&gt;담배 하나만 사자. 다 떨어져서…….&lt;br&gt;담뱃갑 안이 비어가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티모시는 겨우 말라가나 싶더니 또 젖어가는 어깨 위를 가볍게 털고 먼저 들어간다. 그는 일본에서 담배 구매를 세 번쯤 실패한 뒤 이름보다 눈에 익은 마크나 모양새로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으므로 카운터 위 프린트된 담배 목록을 손으로 짚어가며 훑었다. 나란히 놓인 말보로 시리즈 중 아이스블라스트에만 선이 굵은 매직으로 투박하게 엑스 표시가 되어 있었다.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의미야 뻔했다. 비웃음을 닮은 미소를 한 나카에는 직원에게 같은 담배 두 갑을 요청했다.&lt;br&gt;&amp;nbsp;&lt;br&gt;잘됐네. 나이만 보면 너도 곧 아저씨잖아.&lt;br&gt;언제까지고 애들 담배나 태우려고……. 오래 경험한 바 이런 류의 핀잔은 지적이라기보다 농담에 가까웠다. 나카에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놓았다. 얼마인지 가늠하는 데에는 손의 감각만으로 충분했다. 예상대로 직원은 거스름돈을 대신 담배 두 갑을 내밀었다. 말보로 레드. 티모시에게도 익숙한 패키지였다. 한참 주머니를 뒤적이던 나카에는 티모시의 주머니까지 훑은 후 라이터 하나를 더 구매했다. 언제부터 진열되어 있는지 알 수도 없는 기름 라이터였다. 그러나 이게 어디인가 싶더라. 종일 풀리는 일이 없으니 말이다.&lt;br&gt;&amp;nbsp;&lt;br&gt;편의점에서 골목으로 걸어가는 것조차 사치라 문에서 조금 떨어진 벽 근처에서 둘은 시린 공기에서 불을 지키고자 가까이 붙어 선 채 연초를 물었다.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건지 라이터의 휠은 유연하게 돌았다. 숨을 들이켤 때 함께 들이친 찬 공기에 둘은 담배를 처음 배운 고등학생처럼 콜록거려야 했다. 티모시가 등을 대고 선 벽면 포스터에 한자로 금연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지만 티모시를 고사하고 나카에도 담배를 끄지 않았다. 편의점 직원조차 방치하는 걸 보아하니 명목뿐인 경고인 모양이었다. 버릇처럼 필터를 잘근거리니 쓴맛이 올라왔다. &lt;br&gt;&amp;nbsp;&lt;br&gt;이제 우리 어디로 가지.&lt;br&gt;나도 몰라.&lt;br&gt;그래, 뭐…….&lt;br&gt;&amp;nbsp;&lt;br&gt;흰 길을 따라 걸으며 여러 숙박업소를 지나쳤지만 방이 남은 곳은 없다시피 했다. 겨우 비어 있다 싶으면 건물 내부 카페에서부터 바깥에서까지 금연 딱지를 붙여둔 딱딱한 곳이었다. 이제 막 두 대째 불을 붙인 티모시는 나카에의 덜미에서 흔들리는 머플러를 목격한다. 제대로 묶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재를 털어내고 손을 뻗는 것보다 나카에가 티모시 뒤의 포스터에 담배를 지져 끄는 게 먼저였다. 발치의 꽁초는 세 개다. 그는 담배도 참 빨리 태우는 버릇이 있었다.&lt;br&gt;다시 편의점에 들어선 나카에가 직원에게 무어라 질문하는 것 같았지만 제가 있어 봐야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게 뻔했다. 바깥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직원의 손길을 암기하려다 때려치웠다. 이윽고 티모시는 절반쯤 태운 연초를 하수구에 버려야만 했다. 캐리어를 쥔 나카에가 앞서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나란히 남은 발자국이 두 쌍이다. 그는 나카에의 옆보다 뒤를 따라 걸었다. 날이 어두워 한 걸음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 채였다. 그때까지도 티모시의 시선에 가장 거슬렸던 건 거의 풀어헤쳐져 흐르고 있던 머플러의 끝자락이었다. 그냥 그때 다시 매줄 걸 그랬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라도 해야 했던가……. 나카에는 티모시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따르는 걸음 소리가 그의 존재를 증명했다.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쯤 입을 열었다. 눈이 많이 온대. 음성이 갈라졌다.&lt;br&gt;&amp;nbsp;&lt;br&gt;내일도 연착되면 어떡하냐.&lt;br&gt;곤란한 거지……. &lt;br&gt;하여간 대책 없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나카에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를 빛 하나 없이 나아간다. 걸음걸이마다 머플러가 흔들렸다.&lt;br&gt;우리 그냥 일본에서 살까.&lt;br&gt;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농담일 것이다.&lt;br&gt;나 일본어 못 해.&lt;br&gt;내가 잘하잖아.&lt;br&gt;멀쩡한 집을 두고?&lt;br&gt;돈이야 넘치니 그거야 버리면 그만이고…….&lt;br&gt;어디서 살 건데.&lt;br&gt;그냥 여기……. 눈이 질리면 내가 예전에 살던 곳도 있는데.&lt;br&gt;하하. 오늘만 해도 질릴 만큼 맞기는 했어.&lt;br&gt;그래. 거기까지 비행기 타면 금방이야.&lt;br&gt;&amp;nbsp;&lt;br&gt;의미 없는 문답의 반복. 티모시는 이제 나카에의 발자국 위를 따라 밟고 있었다. 나아갈수록 폭 차이가 났다. 나카에의 걸음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lt;br&gt;……근데, 그래도 나는 여기가 너무 생소해. 살면서도 적응을 못 할 수도 있어. 평생 집 안에만 박혀있을지도 모르고. 그러면 네가 내 삶까지 책임져야 해.&lt;br&gt;조용한 사위에서 티모시의 목소리만이 선명했다. 그래줄 거야? 그게 확답을 바라는 질문인지 그저 우리가 주고받던 의미 없는 문답의 연속인지. 띄엄띄엄 놓인 가로등 탓에 횡단보도처럼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을 번갈아 걷던 나카에는 빛무리를 지나고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바닥을 보며 걸었지만 고개를 든 찰나 눈이 마주쳤다. 어둠에 잡아먹힌 나카에의 입매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으나 한참 어두워 티모시는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lt;br&gt;&amp;nbsp;&lt;br&gt;야. 농담이야…….&lt;br&gt;왜인지 어깨에서 힘이 쭉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캐리어를 세워 두고 어깻죽지부터 이어지는 상완을 주물렀으나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한바탕 달린 후 긴장이 다 풀린 사람처럼 꽉 쥐어보는 손에도 부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새 다섯 걸음쯤 멀어진 나카에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손짓한다. 빨리 와! 티모시는 그를 응시했다. 이번에는 빛 아래였다.&lt;br&gt;그는 티모시를 기다리며 주변을 가볍게 둘러본다. 직원은 이 언저리에 여관이 하나 있다고 했지만 영 가정집뿐인 분위기였다. 그로부터 두 골목을 지나고 세 건물을 기웃거리고서야 직원의 설명과 엇비슷한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작다는 말에는 동의하나 별로 아늑해 보이지는 않았다. 손을 뻗으면 닿는 높이에 걸린 간판을 툭 쳤더니 눈이 쏟아졌다. 오래된 곳이라더니 바꿔 달 생각을 않는 건지 이름은 많이 지워져 있었으나 여관이라는 단어는 꽤 선명했다. 평소라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낡아빠진 목조 건물이었지만 어느새 드러난 손끝이 얼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으므로 이만해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lt;br&gt;나카에는 문고리를 쥐고 밀었으나 경첩이 약간 어긋난 모양인지 덜컹거리기만 할뿐 열리지 않아 어깨로 밀어야만 했다. 입구마저 순탄치 않게 열리는 게 어쩌면 영업을 접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마는 이제 공항까지 돌아가는 건 무리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여관과 함께 나이를 먹은 건지 나이 든 노인 하나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티모시는 열린 문턱을 넘지 않고 주변의 길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기에 바빴고 일본에서 이런 일에 그는 없느니만 못했으므로 나카에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내부를 가리켰다.&lt;br&gt;&amp;nbsp;&lt;br&gt;당장 묵을 방 하나 있습니까?&lt;br&gt;혼자십니까?&lt;br&gt;노인의 목소리는 그 나이대치고 꽤 가볍게 들렸다. 소리만 들었다면 보이는 것보다 스무 살은 더 어리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나카에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둘인데요. 노인은 문틈 사이를 내다보았다. 티모시는 제 코트 자락이 눈바닥에 끌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고양이의 턱을 긁어주고 있었다. 애인? 나카에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노인은 관계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고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그는 금방 답을 내놓았다.&lt;br&gt;가족입니다. 제가 누나고 저쪽이 동생.&lt;br&gt;나카에는 티모시를 무례하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lt;br&gt;방이 하나 남아 평소라면 권해드리지 않겠지만, 가족이시라니까…….&lt;br&gt;예. 충분하죠.&lt;br&gt;그는 허름한 여관치고 비싸지만 상식적인 선 안에서 가격을 불렀다. 이리저리 흥정할 수도 있었겠지만 돈 몇 푼 더 낸다고 모자란 형편도 아닌 데다 눈길을 헤치고 오는 데 들었던 피로감을 감출 수 없어 바로 값을 치렀다. 원 없이 놀았는지 시뻘건 손을 감추지 않던 티모시가 돌아오고 노인은 명부 하나를 건넸다. 이 역시 낡은 감을 지울 수가 없어 종이 끝이 조금 삭아 있었다.&lt;br&gt;나카에는 자신의 이름을 수기로 기록했으며 여전히 비어 있는 칸을 목도하고 잠시 손을 멈추었다. 티모시의 이름이 들어가야 할 자리였다. 뒤에서 그의 펜 끝을 응시하던 티모시는 낡은 종이의 귀퉁이를 툭 쳤다.&lt;br&gt;아무거나 적어. 어차피 다시 안 볼 사람이고…….&lt;br&gt;이 외진 곳까지 잘 찾아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때 나카에의 눈에 들어온 건 선반 위 브라운관이었다. 송신 문제인지 날씨 탓인지 자꾸만 끊기는 데다 화질까지 좋지 않은 화면 속에서는 한 남성이 공항을 등진 채 자신의 얼굴을 감싼 채 웅크려 있었다. 그건 흐느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외로워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둘 모두일 지도 몰랐다. 고개를 든 얼굴은 눈물 자국 하나가 없고 생각보다 멀쩡했다. 그는 속으로 먹혀들어 가는듯한 소리를 냈다. 유리, 왜 나를 두고 떠났느냐고……. 무의식중 펜 뒤꽁무니를 한번 달칵였다. 괜찮은 이름 후보다. 티모시는 나카에의 펜촉 아래 날리듯 쓰인 한자를 알아볼 수 없었으나 나카에는 손쉽게 읽을 수 있었다. 나란히 두고 보니 정말 가족이었다.&lt;br&gt;&amp;nbsp;&lt;br&gt;&amp;nbsp;&lt;br&gt;札幌の眠れない夜&lt;br&gt;&amp;nbsp;&lt;br&gt;뒤늦게 목욕을 마친 티모시가 머리카락을 털며 걸어 나왔을 때 나카에는 의자에 반대로 앉은 채 덜 마신 생수 한 병을 손에서 굴리고 있었다. 한참 걸려서 안에서 죽은 건 아닌가 했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병을 던졌고 티모시는 익숙하게 받아 들었다. 잠들 뻔해서……. 그가 좁아터진 욕조에 몸을 담근 채 피로에 반쯤 기절해 있을 때 주인은 기어이 방에까지 들어와 이불을 반듯하게 펴 주었다. 나카에는 담배를 태우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굽은 등이 거슬렸다. 애초에 깔아두던가. 아무래도 이건 친절이 조금 과했다.&lt;br&gt;오랜 목욕으로 수분이 부족한 모양인지 남은 물을 전부 들이켰다. 텅 빈 물병을 하나뿐인 테이블 위에 세워두었다. 나카에는 발끝을 달랑거렸다.&lt;br&gt;아까 편의점 기억나?&lt;br&gt;하하. 응, 분명 야쿠자라고 생각했을 거야…….&lt;br&gt;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냐.&lt;br&gt;영화에서.&lt;br&gt;하기야 눈을 한 쪽씩 가린 채 까만 옷을 입고 다니는 게 여간 불량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마는. 나카에는 손을 까딱이는 것으로 티모시를 호출한다. 그는 순순히 나카에를 향해 다가와 귀를 기울인다. 그는 아주 귀한 비밀을 말하듯 조그마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속삭인다. 직원이 말이야.&lt;br&gt;&amp;nbsp;&lt;br&gt;여기 귀신이 나온다던데.&lt;br&gt;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티모시는 다시금 팔뚝을 주무른다. 익숙한 감각이다. 어깨에 힘이 풀리는 듯한 감각. 그때쯤 그는 깨닫는다. 이건 마음이 놓인 거였다. 몸이 제멋대로 긴장을 풀어버릴 정도로.&lt;br&gt;……너 그런 거 믿나보다.&lt;br&gt;믿는 건 아니고.&lt;br&gt;일본 귀신은 더럽게 독하고 끈질기다니까 조심하라고. 나카에는 멀쩡한 제 몫을 두고 티모시의 이부자리를 파고들었다. 남성의 몫으로 준비되는 것이 조금 더 크고 넓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아나. 못 건넌다는 물이라도 한번 건너보려고 사람 몸을 노릴지. 티모시는 개의치 않고 같은 이불 안으로 들어간다. 나카에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지만 틈을 내어주었다.&lt;br&gt;&amp;nbsp;&lt;br&gt;뭐 하냐.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으면 너부터 제물로 던져달라고?&lt;br&gt;아니, 춥잖아…….&lt;br&gt;야, 겨울은 원래 추워…….&lt;br&gt;조그맣게 웃는 소리를 내던 티모시는 금방 잠들었다. 나카에는 자신의 시야 역시 가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조금 자세를 바꾸어 바로 누웠다. 아래에 쓸렸던 옷소매가 말려 올라가고 동시에 맞닿은 살갗에 미적지근한 온기가 퍼진다. 나카에는 하늘이 내린 모든 가족을 버렸고 제 손으로 새 천륜을 구축하려 했다. 그 대상이 여기에 있었다. 지인은커녕 간단한 어휘조차 모르는 먼 타지까지 따라온 남자가. 이기적인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들과의 추억마저 제가 고른 것으로 뒤덮으려 했다. 진짜 가족과 함께한다는 건 이런 기분일지도 몰랐다. 이 사람이라면 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다거나. 남을 곤란하게 만들 소리를 하고 만다거나. 눈을 한번 깜빡일 때마다 벽에 걸린 시곗바늘이 한참을 뛰어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평화로운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그러나, 누군들 이런 일상을 바라지 않던가…….&lt;br&gt;티모시는 머리맡까지 침범한 햇빛을 직통으로 맞고서야 눈을 떴다. 아주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여유를 부릴 시간도 없었다. 나카에는 여전히 실내복을 입은 채였지만 이미 담배를 세 대째 태운 후였다. 잠을 설친 건지 지난날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그는 티모시가 세수에 양치를 끝낼 때까지 지겹게도 연초를 놓지 못하더니 코트를 걸치려고 들 때쯤에야 느지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 번호를 표기한 조잡한 열쇠를 카운터에 건넸다. 티모시는 담배 하나를 문 채 바깥으로 나간다. 나카에는 노인의 등 뒤에 걸린 열쇠의 개수를 셌다. 빽빽했다.&lt;br&gt;&amp;nbsp;&lt;br&gt;간밤에 꽤 바쁘셨겠어요.&lt;br&gt;관리라는 게 다 그렇습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건 예삿일이죠.&lt;br&gt;그러게요. 같은 복도를 맴돌면서 하나 있는 고객들이 정말 잠들었나 감시도 하고, 서비스인 척 방에 짐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살피시고요.&lt;br&gt;라이터 휠을 굴릴 때마다 찰칵이는 소리가 울렸다. 이 정도로 낡은 목재 건물이라면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진화를 위해 퍼부은 물에도 무너질 게 분명했다.&lt;br&gt;&amp;nbsp;&lt;br&gt;나카에는 낮게 웃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다 갈라진 음성은 의도를 떠나 조금 위협적으로 들렸다. 눈을 떴을 때 조금 달라진 캐리어의 위치나 덜 닫힌 문을 보아하니 주인의 목적은 뻔했다. 현금이 별로 없어서 실망하셨겠습니다. 그는 카운터 위로 라이터를 밀어주었다. 시야 구석으로 떨리는 노인의 손끝이 보였다. 이건 버려주세요. 야쿠자가 현금이 많을 거라는 착각은 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뭐, 우리가 진짜 그런 일을 한다는 건 아니지만……. 나카에의 어미는 불투명하게 떨어진다. 어쩌면 비슷했던지도 모르겠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한 노인은 무언가 변명의 말을 지껄였으나 그는 카운터 한구석에 놓인 지폐 위를 가볍게 두드릴 뿐이었다. 전날 나카에가 지불했던 분량이었다.&lt;br&gt;한 번만 봐 드리는 거예요. 보는 눈이 있으니까…….&lt;br&gt;티모시는 라이터가 없어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반대 편에서 여관을 바라본다. 날이 밝으니 이 건물은 그러니까, 조금 무례한 표현이지만, 영락없는 폐가의 모습이었다. 버려진 건물임이 분명했다. 굳이 이 여관을 추천해 준 편의점 직원이나 모두 한패인 게 분명했다. 분류하자면 도망자거나 추격자거나.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정말 귀신이라거나……. 크게 난 창문을 통해 카운터 주변을 뒤적이는 나카에가 보였다. 그는 무언가를 꺼내 들더니 티모시에게로 곧장 걸어오더니 소금 한 줌을 그대로 흩뿌렸다. 발치를 맴돌던 고양이는 느닷없이 쏟아지는 염분 세례에 빠르게 도망쳤다. 티모시가 영 정신을 못 차리는 틈을 타 나카에는 손에 남은 조각마저 그에게 털어냈다. 야, 너…….&lt;br&gt;진짜 믿는 건 아니지?&lt;br&gt;나카에는 입매를 당겨 미소 지었다.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악의는 쉽게 옮고, 귀신보다 내 주머니를 털어가는 사기꾼이 더 나쁜 법이다.&lt;br&gt;&amp;nbsp;&lt;br&gt;너한테 귀신이라도 앉았을까 봐 퇴마 중.&lt;br&gt;어제는 안 믿는다며…….&lt;br&gt;덜 마른 코트 자락에 소금기가 어려 짠 내가 났다. 티모시는 여전히 나카에의 덜미에서 달랑이는 머플러 자락을 목격하고 손을 뻗는다. 사소한 것에 대충인 것마저 그의 버릇 중 하나였다. 비슷한 매듭을 지을 때쯤 둘의 머플러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제 와서 바꾸어 맬 생각은 없었다. 담배 연기가 푸른 하늘을 갈랐다. 날이 유난히 맑았다. 주민들은 하염없이 눈이 쏟아지는 홋카이도를 가끔 지겨워했지만 사각이며 가벼운 질감으로 밟히는 눈밭은 감각만으로도 여행의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간에 말이다. 나카에는 오늘 비행기가 뜰 것을 예감했다. 한 시가 목전이었다.&lt;/p&gt;</description>
      <author>짼젤</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chae-back.tistory.com/3</guid>
      <comments>https://chae-back.tistory.com/3#entry3comment</comments>
      <pubDate>Thu, 20 Nov 2025 05:26:27 +0900</pubDate>
    </item>
    <item>
      <title>悩め、 生きて, 怪物達よ</title>
      <link>https://chae-back.tistory.com/2</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반나절하고도 아홉 시간 전부터 유럽에 닥친 폭설은 갑작스러웠고 동시에 모든 일정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기상 악화가 지난할 것을 감지한 항공사들은 전광판을 통해 앞다퉈 기약 없는 연착을 알렸으며 이미 하루가 지난 기체는 결항 알림을 띄워놓기도 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칠 기미가 없어 보이는 눈보라에 공항 내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여기저기서 분노에 젖은 항의의 목소리가 들렸고 어딘가에서는 급히 전화를 걸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성토하기에 바빴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여러 소음이 섞여 이젠 거의 아마추어 하모니처럼 들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 누구도 다른 이의 사정을 묻지 않았고 궁금해하지 않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대도시의 사람은 대체로 주위를 둘러볼 여유 따위가 없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는 피곤에 젖은 눈을 부비며 이 모든 상황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도 그럴 게 꽤 인위적인 장면이 아닌가&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는 도피를 하고 있고&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잃어버린 우산에 개판인 날씨까지 수많은 요소가 앞길을 막고 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겨우 입에 밀어 넣으려던 빵쪼가리마저 한 남성과 부딪치는 바람에 공항의 시린 바닥에 반납하고서야 확신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이건 그냥 돌아가라는 신의 계시인지도 몰라&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신앙심이 깊은 것도 아니었지만&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애초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마는 오늘만큼은 왜인지 그의 진언에 동조해도 좋겠다는 착각이 들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하지만 내게 돌아갈 곳이 있었던가&lt;/span&gt;&lt;span&gt;&amp;hellip;&amp;hellip;&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멍이 든 복부 근처가 욱신거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는 그 부근을 뭉근히 문질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통각에 현실감이 일부 복귀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이가 들며 늘어가는 건 쓸데없는 잡생각뿐이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한참 전광판을 들여다보던 나카에가 티모시의 멀쩡한 팔뚝을 당긴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야&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멍때리지 말고 따라와&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잃어버리면 답도 없어&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티모시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응&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카에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두 발짝 앞서 걸어간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건 동행인이 당연히 자신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이 담긴 걸음걸이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는 그를 배신하지 않고 뒤따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돌아갈 곳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인정하기까지 길고 긴 시간이 걸렸지만&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솔직히 고하자면 지금도 인정한 적 없는 소리지만&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래&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확신한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건 아주 간단한 로직이었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비행기가 뜬 건 기적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겨우 이륙을 감행한 두 기체가 풍향 탓에 별 소득 없이 회항하고&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로 인해 같은 활주로를 사용해야 하는 비행편은 또다시 미뤄졌고&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들 역시 좁아터진 비행기에 나란히 앉아 한 시간을 대기했으며&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가 미동도 없는 창문 밖을 열네 번 내다보았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비행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카에는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사람치고 차분해 보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러니까&lt;/span&gt;&lt;span&gt;&amp;hellip;&amp;hellip; &lt;/span&gt;&lt;span&gt;티모시의 의학적 소견에 빗대자면&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불안해 보이지 않았다는 의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기체에 몸을 실은 순간부터 나카에는 손톱 거스러미를 뜯지도 않았고 병적으로 다리를 떨지도 않았으며 그저 기내 상품 카탈로그를 넘겨볼 뿐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의 손길은 면세 품목에서 멈추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아마 담배겠지&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좁아터진 이코노미석은 반올림하면 이 미터 수준인 몸에 걸맞지 않아 조금 뒤척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카에는 아주 기민하게도 티모시의 움직임을 감지했지만 그는 시선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아직 덜 아문 상완이 거슬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의 몸은 여전히 하자투성이였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나카에는 오를리&lt;/span&gt;&lt;span&gt;Orly&lt;/span&gt;&lt;span&gt;에서 하네다&lt;/span&gt;&lt;span&gt;Haneda&lt;/span&gt;&lt;span&gt;로 향하는 직항편을 구하지 않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들은 파리에서 밀라노까지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급하게 구한 좌석은 지금 앉은 이코노미석 못지않게 좁아터졌지만 아무도 그들의 신원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이 열차 내부에 수배자가 자신들뿐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럼에도 두렵지 않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아주 제 집인양 잠에 든 티모시를 깨우는 데만 십 분을 써야 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결국 자리 아래로 굴러떨어진 채 눈을 뜬 티모시는 세수도 못 하고 주차장 구석으로 끌려갔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카에는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중형 &lt;/span&gt;&lt;span&gt;SUV&lt;/span&gt;&lt;span&gt;의 운전석을 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힘을 들이지 않아도 문은 쉽게 열렸고&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내부에는 온기가 감돌았으나 인기척은 없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배웅이라도 하러 간 모양이지&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러나 이 전쟁 같은 유럽에서 그런 온기는 존중받지 못한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를 조수석에 처박은 나카에는 운전석의 의자를 제게 맞추어 조정하고 글러브박스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좋은 게 있잖아&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중얼거리며 티모시의 눈가에 씌운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건 마치 제 것처럼 어울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그게 바로 지금 티모시의 흰 티셔츠에 달랑 매달린 브랜드 선글라스의 정체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이 비행기에 도달하기까지 잘라버린 면허증이 하나&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신분증이 넷&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일본에 도착한다면 여권이 둘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카에는 긴 비행에 승무원이 건넨 플라스틱 컵 두 개를 받아들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내부에는 와인이 담겨 있었고&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카에는 두 잔을 전부 티모시에게 넘겼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리고 아래를 받치고 있던 휴지에 두 단어를 휘갈겼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なかえ&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ゆり&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둥글게 그려지는 게 잠깐 들여다보아도 일본어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심을 집어넣지 않은 볼펜이 단어 위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의 시선은 단어보다 나카에의 소소한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고 있기에 주의를 집중시킨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네가 읽어야 하는 단어는 이 두 개가 다야&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카에&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유리&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그래&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이건 네 이름이고&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다음 건 뭔데&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전부 네 이름&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뭐&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직업은 의사&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이름은 나카에 유리&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읽기 편한 걸로 골라줬는데 뭐가 문제야&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그러니까&lt;/span&gt;&lt;span&gt;&amp;hellip;&amp;hellip;&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왜 나카에&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생판 남이랑 산다는데 이상한 소문이 안 나겠어&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 보수적인 동네에서&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가본 적도 없는 동네가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 그따위 걸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덤벼들 수도 있었겠지만&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그런 성격이 못 되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는 조금은 맹한 얼굴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제 손에 들린 여권에 적힌 이름&lt;/span&gt;&lt;span&gt;佐藤 勇利&lt;/span&gt;&lt;span&gt;이 나카에가 가르쳐준 이름과 다르다는 사실도 몰랐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어차피 행정 절차가 끝난다면 서로가 서로를 뭐라고 부르건&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타인에게 자신을 뭐라고 소개하건 이름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카에는 티모시가 제 글씨에서 시선을 뗄 때쯤에야 휴지를 찢기 시작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상술한 사유로 성 따위는 없어도 좋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러나 이름을 버릴지 말지에 관한 건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러니 티모시에게 자신의 흔적을 떠넘긴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제 결정에 반기를 들지 않을 것이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나카에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휴지를 조각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리고 마시지 않은 와인이 삼 분의 이쯤 담긴 컵에 휴짓조각을 밀어 넣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붉은빛 액체를 타고 수용성 잉크가 번져나간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승무원은 그 모습을 보고 아주 질색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승무원이 쓰레기가 된 컵을 정리하는 동안 그는 개의치 않고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는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이제 흔적이라면 적게 남을수록 좋았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悩&lt;/span&gt;&lt;span&gt;め&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生&lt;/span&gt;&lt;span&gt;きて&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怪物達&lt;/span&gt;&lt;span&gt;よ&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이제 실내에서 한텐을 챙겨 입는 일에 익숙해진 티모시에게는 작은 버릇이 하나 생겼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오후 세 시가 되면 담뱃갑을 챙긴 채 추위를 감수한 채 크게 난 베란다 문을 열어젖힌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건물이 실내 흡연 가능 맨션이라는 것에 흥미를 보인 건 나카에였지만&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자주 집에 붙어있는 건 그보다 티모시였으므로 나카에만의 버릇이었던 실내 흡연은 그에게도 옮겨붙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럼에도 다다미 바닥은 담뱃재에 취약했고&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일본의 벽지나 바닥재는 한순간에 담배 냄새에 찌드는 모양이므로 방에서 담배를 태우는 무뢰배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베란다 문을 단단히 잠근 채로 담배 한 대를 빼어 물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찬 바람이 부스스한 머리칼을 한바탕 뒤집어놓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러나 그는 그저 바람에 라이터 불이 아스러질까 소중하게 막은 채 담뱃불을 댈 뿐이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동시에 주머니에 대충 넣었던 휴대전화가 타일 바닥으로 추락했으나 개의치 않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기껏해야 금이 조금 갔을 테지&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어차피 와이파이를 연결해 두지 않은 아이폰에는 아무런 알림도 도착하지 않는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읽는 법을 모르는 신문과 모르는 말이 쏟아지는 &lt;/span&gt;&lt;span&gt;TV&lt;/span&gt;&lt;span&gt;를 벗 삼아 집을 지키다 보면 답지 않게 두고 온 것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언어를 배우는 일에 도전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나이가 찰 대로 차다보면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는 곧잘 떨어지기 마련이었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최근 새 직장을 마련한 나카에에게도 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겼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아주 먼 곳까지 날아왔음을 알고 있지만&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발각됐다면 이미 발각되고도 남았을 테지만 나카에는 두고 온 마법사를 떠올리고는 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 복수광은 나카에를 닮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랬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백칠십 대 후반에서 백팔십 대 초반의 신장을 가졌으며 실루엣을 보아하니 꽤 마른 편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가볍게 흐트러지는 흑발과 붉게 번뜩이는 눈알까지&lt;/span&gt;&lt;span&gt;&amp;hellip;&amp;hellip;&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처음 보았을 때 자신의 습격인 줄로만 알았다는 티모시의 우스갯소리를 흘려듣는가 했더니 일본까지 와서도 저 닮은 사람만 보면 개라도 된 듯 졸졸 쫓아고는 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지금까지 폭력이나 마법을 동반한 유혈 사태는 터진 적이 없으나 언제 그 목적지가 정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티모시는 그 목적지가 자신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크게 잘못한 일이 있다기보다는&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지금까지 쌓인 빅데이터가 그랬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깊게 숨을 빨아당긴 티모시는 문득 담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거주지를 옮긴 뒤로 정신이 없는 티를 내는 건지&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 불만 없이 난간에 지져 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갈무리하지 못한 담뱃재가 한텐 소매에 떨어진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네&lt;/span&gt;&lt;span&gt;&amp;hellip;&amp;hellip;&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베란다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려고 뒤를 돈 티모시는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마주한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가까이 달라붙은 옆집 베란다에서부터 뻗어 나온 자그마한 손이 티모시의 휴대전화를 훔치고 있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얇게 눈을 뜨고 소녀의 정체를 가늠한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작은 덩치의 도둑은 옆집에 사는 일곱 살배기 여자애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시노나가&lt;/span&gt;&lt;span&gt;篠永&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카노&lt;/span&gt;&lt;span&gt;華乃&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카에는 복도에서 그 애를 처음 마주친 순간 알아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부모가 정상은 아니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위생 상태를 보아하니 방임이 분명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들은 카노를 경계하지 않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이러나저러나 동류를 보는 마음일까&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혹은 동정의 마음이 아직 남아있나&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하여튼&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학교도 제대로 못 가는 애가 타국어로 설정된 휴대전화를 제대로 뒤질 수 있을 리 없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손짓했으며&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카노는 휴대전화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화면이 새 알람으로 반짝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액정에는 세로로 큰 금이 가 있었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카노에게서는 언제나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함께 거주하는 이가 흡연자임이 분명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래서 티모시는 카노가 있다고 담배를 끄지 않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그저&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소매가 조금 타들어 간 한텐을 바꾸어 입고&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새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돌아왔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여전히 카노는 위태롭게 난간에 매달려 티모시가 불을 붙이는 것을 방관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아이의 목소리는 매일 흡연에 노출된 것치고 여느 아동처럼 통통 튀었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유리는 왜 매일 여기에 있어&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티모시는 그 짧은 말을 알아듣는데도 한참이 걸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휴대전화를 몇 번 조작하더니 카노에게 내밀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응&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잇새로 호응과도 같은 소리가 샜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카노는 눈치도 빠르게 질문을 한 번 더 속삭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일어는 순식간에 영어로 변환되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번역 기능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어순부터 혀를 굴리는 법까지 전부 다른 언어는 몇 번을 들어도 귀에 익질 않았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답변은 망설임이 없고&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둘 사이에는 위태롭게 휴대전화가 놓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는 쉬운 단어를 고르기 위해 노력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카노 역시 마찬가지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고운 번역을 위해서는 간단명료함이 중요했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친구가 없어서&lt;/span&gt;&lt;span&gt;I don't have friends&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나도 그런데&lt;/span&gt;&lt;span&gt;私&lt;/span&gt;&lt;span&gt;も&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유감이네&lt;/span&gt;&lt;span&gt;Too bad&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이제 괜찮아&lt;/span&gt;&lt;span&gt;もう&lt;/span&gt;&lt;span&gt;大丈夫&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유리는 뭐 때문에 온 거야&lt;/span&gt;&lt;span&gt;勇利&lt;/span&gt;&lt;span&gt;は&lt;/span&gt;&lt;span&gt;何&lt;/span&gt;&lt;span&gt;のために&lt;/span&gt;&lt;span&gt;来&lt;/span&gt;&lt;span&gt;たの&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아&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는 번역 기능을 잠시 차단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이런 때에 꼭 하고 싶은 일본어가 있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방랑벽이야&lt;/span&gt;&lt;span&gt;放浪癖&lt;/span&gt;&lt;span&gt;だよ&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드라마에서 스치듯 나온 말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에게 한 음절씩 단단히 굳혀 발음하는 버릇은 없었지만 원어민이라면 능숙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짧은 문장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아이는 수줍게 입을 가리고 조금 웃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도 여행하고 싶어&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대충 뉘앙스는 받아들였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될 거야&lt;/span&gt;&lt;span&gt;できる&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바람을 맞은 목소리가 낮게 갈라진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뒤늦게 번역 기능을 가동했으나&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이제 정말 들어가 봐야 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곧 나카에가 돌아온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는 아직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만&lt;/span&gt;&lt;span&gt;-&lt;/span&gt;&lt;span&gt;새로 마련한 가짜 학력을 대는 일에도 이제 익숙해졌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나카에는 며칠간 발품을 팔더니 금방 사무실 하나를 마련해 흥신소와 닮은 일을 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금전운이라면 타고난 건지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의 사무실에는 꽤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는 버려진 꽁초를 주워 베란다 구석의 간이 쓰레기통에 버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자신과 닮은 여자를 보았다는 메시지가 선연했으므로 복귀한 이의 기분이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카노는 매달린 다리를 가볍게 달랑거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가벼운 몸체가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만 같았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벌써 들어가&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응&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다음에 또 봐&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같이 사는 사람 돌아오는구나&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카노는 그 사람도 궁금한데&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아직 이름도 안 알려주고&lt;/span&gt;&lt;span&gt;&amp;hellip;&amp;hellip;&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span&gt;한텐을 툭툭 털어 담배 냄새를 날려 보낸 티모시는 차근히 말을 고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모를 때가 제일 좋은 거야&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런 사람은&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상대는 티모시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그걸로 충분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카노는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둘은 무슨 사이에요&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신경질적으로 열쇠 구멍을 들쑤시는 소리가 베란다까지 들렸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티모시는 얇은 검지를 입가에 댄다&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비밀이야&lt;/span&gt;&lt;span&gt;秘密&lt;/span&gt;&lt;span&gt;. &lt;/span&gt;&lt;span&gt;동시에 현관문이 열렸다&lt;/span&gt;&lt;span&gt;.&lt;/span&gt;&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description>
      <author>짼젤</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chae-back.tistory.com/2</guid>
      <comments>https://chae-back.tistory.com/2#entry2comment</comments>
      <pubDate>Thu, 20 Nov 2025 05:21:38 +0900</pubDate>
    </item>
    <item>
      <title>한 사람의 신</title>
      <link>https://chae-back.tistory.com/1</link>
      <description>&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r /&gt;&amp;ldquo;그렇게&amp;nbsp;보면&amp;nbsp;뭐가&amp;nbsp;제대로&amp;nbsp;보이겠어?&amp;rdquo; &lt;br /&gt;핀잔은&amp;nbsp;등&amp;nbsp;뒤에서부터&amp;nbsp;날아왔다.&amp;nbsp;백로처럼&amp;nbsp;목을&amp;nbsp;꺾으며&amp;nbsp;시체를&amp;nbsp;거꾸로&amp;nbsp;보려던&amp;nbsp;나카에는&amp;nbsp;고개를&amp;nbsp;바로&amp;nbsp;들고&amp;nbsp;현장을&amp;nbsp;돌아봤다.&amp;nbsp;현장&amp;nbsp;안쪽에&amp;nbsp;들어와&amp;nbsp;있는&amp;nbsp;요원은&amp;nbsp;총&amp;nbsp;셋.&amp;nbsp;그중&amp;nbsp;하나는&amp;nbsp;폴리스&amp;nbsp;라인&amp;nbsp;근처에서&amp;nbsp;민원을&amp;nbsp;상대하고&amp;nbsp;있었다.&amp;nbsp;&amp;ldquo;밤은&amp;nbsp;춥다구.&amp;rdquo;&amp;nbsp;민원인은&amp;nbsp;막무가내로&amp;nbsp;성토했다.&amp;nbsp;&amp;ldquo;불알이&amp;nbsp;두&amp;nbsp;쪽&amp;nbsp;다&amp;nbsp;떨어져&amp;nbsp;나갈&amp;nbsp;것&amp;nbsp;같다니까.&amp;nbsp;응?&amp;rdquo;&amp;nbsp;그는&amp;nbsp;머리가&amp;nbsp;덥수룩하게&amp;nbsp;길고&amp;nbsp;꾀죄죄한&amp;nbsp;몰골로,&amp;nbsp;아무래도&amp;nbsp;거리를&amp;nbsp;떠돌면서&amp;nbsp;이&amp;nbsp;일대를&amp;nbsp;일종의&amp;nbsp;거주&amp;nbsp;구역&amp;nbsp;삼은&amp;nbsp;모양이었다.&amp;nbsp;변변찮은&amp;nbsp;외투도&amp;nbsp;못&amp;nbsp;걸친&amp;nbsp;차림이&amp;nbsp;어지간히&amp;nbsp;추워&amp;nbsp;보이기는&amp;nbsp;했다.&amp;nbsp;닳아빠진&amp;nbsp;집업&amp;nbsp;위로&amp;nbsp;고작&amp;nbsp;낡은&amp;nbsp;묵주&amp;nbsp;하나가&amp;nbsp;흔들거렸다.&amp;nbsp;안으로&amp;nbsp;밀고&amp;nbsp;들어오지는&amp;nbsp;못하면서도&amp;nbsp;순순히&amp;nbsp;물러날&amp;nbsp;생각&amp;nbsp;역시&amp;nbsp;없어&amp;nbsp;보였고,&amp;nbsp;막내는&amp;nbsp;그를&amp;nbsp;단호히&amp;nbsp;밀어내지&amp;nbsp;못한&amp;nbsp;채&amp;nbsp;쩔쩔매고&amp;nbsp;있었다.&amp;nbsp;아직&amp;nbsp;경험이&amp;nbsp;부족하다니까.&amp;nbsp;막내가&amp;nbsp;홍역을&amp;nbsp;단단히&amp;nbsp;치르든&amp;nbsp;말든&amp;nbsp;팀&amp;nbsp;치프는&amp;nbsp;구석에&amp;nbsp;간이의자를&amp;nbsp;놓고&amp;nbsp;걸터앉아서&amp;nbsp;상황을&amp;nbsp;방관하고&amp;nbsp;있었다.&amp;nbsp;그는&amp;nbsp;대체로&amp;nbsp;방임주의에다&amp;nbsp;현장&amp;nbsp;교육을&amp;nbsp;중시했고&amp;nbsp;성격은&amp;nbsp;다소&amp;nbsp;거칠었다.&amp;nbsp;그렇다&amp;nbsp;보니&amp;nbsp;옆&amp;nbsp;팀&amp;nbsp;치프에&amp;nbsp;비해&amp;nbsp;인기는&amp;nbsp;상당히&amp;nbsp;없었지만&amp;nbsp;성과는&amp;nbsp;비등비등했다.&amp;nbsp;&amp;ldquo;스트레칭&amp;nbsp;좀&amp;nbsp;했습니다.&amp;rdquo;&amp;nbsp;오늘따라&amp;nbsp;더욱&amp;nbsp;불퉁한&amp;nbsp;태도를&amp;nbsp;보이는&amp;nbsp;상관에게&amp;nbsp;뻗대는&amp;nbsp;대신&amp;nbsp;간결히&amp;nbsp;대답하고,&amp;nbsp;나카에는&amp;nbsp;바로&amp;nbsp;방향을&amp;nbsp;틀었다.&amp;nbsp;&amp;ldquo;묵주!&amp;rdquo;&amp;nbsp;&amp;ldquo;네?&amp;rdquo;&amp;nbsp;막내가&amp;nbsp;뒤를&amp;nbsp;돌아보며&amp;nbsp;갑작스런&amp;nbsp;소리에&amp;nbsp;반문했다.&amp;nbsp;그&amp;nbsp;사이에&amp;nbsp;꾀죄죄한&amp;nbsp;남자는&amp;nbsp;칫&amp;nbsp;하고&amp;nbsp;혀를&amp;nbsp;차며&amp;nbsp;재빨리&amp;nbsp;몸을&amp;nbsp;빼내려고&amp;nbsp;했다.&amp;nbsp;그러나&amp;nbsp;그보다도&amp;nbsp;막내의&amp;nbsp;반응이&amp;nbsp;빨랐다.&amp;nbsp;그는&amp;nbsp;잠깐&amp;nbsp;낭패한&amp;nbsp;얼굴을&amp;nbsp;하고는&amp;nbsp;바로&amp;nbsp;다리를&amp;nbsp;걸어&amp;nbsp;남자를&amp;nbsp;넘어트리고&amp;nbsp;두&amp;nbsp;팔을&amp;nbsp;빠르게&amp;nbsp;등&amp;nbsp;뒤로&amp;nbsp;꺾으며&amp;nbsp;그&amp;nbsp;위에&amp;nbsp;올라탔다.&amp;nbsp;악&amp;nbsp;소리가&amp;nbsp;났다.&amp;nbsp;등&amp;nbsp;위에&amp;nbsp;무거운&amp;nbsp;덩치를&amp;nbsp;올린&amp;nbsp;채&amp;nbsp;발버둥치는&amp;nbsp;남자에게로&amp;nbsp;빠르게&amp;nbsp;걸어간&amp;nbsp;나카에는&amp;nbsp;곧&amp;nbsp;그&amp;nbsp;목에서&amp;nbsp;묵주를&amp;nbsp;낚아채&amp;nbsp;빼냈다. &lt;br /&gt;&amp;ldquo;이봐,&amp;nbsp;기자&amp;nbsp;양반.&amp;nbsp;이런&amp;nbsp;장난감을&amp;nbsp;갖고&amp;nbsp;오면&amp;nbsp;안&amp;nbsp;되지.&amp;rdquo; &lt;br /&gt;&amp;ldquo;당신들&amp;nbsp;이거&amp;nbsp;과잉&amp;nbsp;진압이야!&amp;nbsp;언론에&amp;nbsp;제보할&amp;nbsp;거라고,&amp;nbsp;진짜야!&amp;rdquo; &lt;br /&gt;&amp;ldquo;네,&amp;nbsp;네.&amp;rdquo; &lt;br /&gt;그녀의&amp;nbsp;사나운&amp;nbsp;손이&amp;nbsp;묵주의&amp;nbsp;십자가를&amp;nbsp;앞뒤로&amp;nbsp;뒤집으며&amp;nbsp;살폈다.&amp;nbsp;십자고상의&amp;nbsp;윗부분,&amp;nbsp;구원자의&amp;nbsp;머리&amp;nbsp;위에는&amp;nbsp;푯말&amp;nbsp;대신&amp;nbsp;외눈이&amp;nbsp;새겨져&amp;nbsp;있었다.&amp;nbsp;외눈의&amp;nbsp;눈동자&amp;nbsp;안쪽은&amp;nbsp;좁고&amp;nbsp;어두웠지만&amp;nbsp;초소형&amp;nbsp;렌즈가&amp;nbsp;삽입되어&amp;nbsp;한순간&amp;nbsp;반짝였다.&amp;nbsp;그제야&amp;nbsp;위장용&amp;nbsp;카메라라는&amp;nbsp;사실을&amp;nbsp;알아챈&amp;nbsp;막내도&amp;nbsp;놀람과&amp;nbsp;감탄이&amp;nbsp;섞인&amp;nbsp;얼굴을&amp;nbsp;하고&amp;nbsp;이쪽을&amp;nbsp;바라봤다.&amp;nbsp;나카에가&amp;nbsp;그&amp;nbsp;서툰&amp;nbsp;얼굴에&amp;nbsp;대고&amp;nbsp;픽&amp;nbsp;웃어주려는&amp;nbsp;때였다.&amp;nbsp;&amp;ldquo;좋아!&amp;rdquo;&amp;nbsp;치프가&amp;nbsp;찌뿌둥한&amp;nbsp;몸을&amp;nbsp;일으키며&amp;nbsp;근처로&amp;nbsp;걸어왔다.&amp;nbsp;그는&amp;nbsp;아직&amp;nbsp;기자의&amp;nbsp;몸에&amp;nbsp;올라타&amp;nbsp;있는&amp;nbsp;막내에게&amp;nbsp;다가가&amp;nbsp;어깨를&amp;nbsp;두드려주었다.&amp;nbsp;&amp;ldquo;아래쪽에&amp;nbsp;지원&amp;nbsp;나오면&amp;nbsp;이&amp;nbsp;자식&amp;nbsp;인계해.&amp;nbsp;추워&amp;nbsp;보이는데&amp;nbsp;모포도&amp;nbsp;둘러주고.&amp;nbsp;불쌍하게도&amp;nbsp;엄청&amp;nbsp;떠네.&amp;nbsp;그럼&amp;nbsp;더&amp;nbsp;볼&amp;nbsp;것도&amp;nbsp;없겠다&amp;nbsp;해산.&amp;nbsp;퇴근들&amp;nbsp;하지.&amp;rdquo;&amp;nbsp;속사포처럼&amp;nbsp;쏟아져나온&amp;nbsp;결론에&amp;nbsp;나카에가&amp;nbsp;눈을&amp;nbsp;불만스럽게&amp;nbsp;치떴다.&amp;nbsp;&amp;ldquo;현장&amp;nbsp;청취&amp;nbsp;아직&amp;nbsp;안&amp;nbsp;끝난&amp;nbsp;걸로&amp;nbsp;압니다만.&amp;rdquo;&amp;nbsp;&amp;ldquo;날씨&amp;nbsp;봐라.&amp;nbsp;이런&amp;nbsp;날엔&amp;nbsp;사람도&amp;nbsp;안&amp;nbsp;다니고&amp;nbsp;뭐&amp;nbsp;안&amp;nbsp;나와.&amp;nbsp;예보&amp;nbsp;봤어?&amp;rdquo;&amp;nbsp;떠나기&amp;nbsp;전&amp;nbsp;현장을&amp;nbsp;둘러보는&amp;nbsp;치프가&amp;nbsp;마지막으로&amp;nbsp;얼어붙은&amp;nbsp;시체에&amp;nbsp;시선을&amp;nbsp;던지며&amp;nbsp;미소지었다.&amp;nbsp;신원&amp;nbsp;미상의&amp;nbsp;그는&amp;nbsp;최초&amp;nbsp;신고가&amp;nbsp;들어온&amp;nbsp;이래&amp;nbsp;거꾸로&amp;nbsp;매달린&amp;nbsp;채&amp;nbsp;혹한에&amp;nbsp;방치되어&amp;nbsp;있었다. &lt;br /&gt;&lt;br /&gt;&amp;ldquo;폭설이랜다.&amp;rdquo; &lt;br /&gt;두&amp;nbsp;시간&amp;nbsp;만에&amp;nbsp;적설량은&amp;nbsp;10cm를&amp;nbsp;넘어섰다.&amp;nbsp;기록적이었다. &lt;br /&gt;&lt;br /&gt;연말이&amp;nbsp;다가와&amp;nbsp;부쩍&amp;nbsp;추워진&amp;nbsp;거리에는&amp;nbsp;안&amp;nbsp;그래도&amp;nbsp;사람이&amp;nbsp;얼마&amp;nbsp;없었다.&amp;nbsp;시민들은&amp;nbsp;이변을&amp;nbsp;모르고&amp;nbsp;쥐&amp;nbsp;죽은&amp;nbsp;듯&amp;nbsp;잠들었다가&amp;nbsp;날이&amp;nbsp;밝으면&amp;nbsp;자기들이&amp;nbsp;갑작스레&amp;nbsp;고립되었다는&amp;nbsp;사실을&amp;nbsp;받아들이게&amp;nbsp;될&amp;nbsp;것이다.&amp;nbsp;몇&amp;nbsp;사람만이&amp;nbsp;눈발을&amp;nbsp;헤치고&amp;nbsp;길을&amp;nbsp;뚫으며&amp;nbsp;걸어가고&amp;nbsp;있었다.&amp;nbsp;무릎까지&amp;nbsp;발이&amp;nbsp;푹푹&amp;nbsp;박혔다.&amp;nbsp;눈&amp;nbsp;닿는&amp;nbsp;곳마다&amp;nbsp;온통&amp;nbsp;하얗다.&amp;nbsp;런던&amp;nbsp;한복판에&amp;nbsp;펼쳐진&amp;nbsp;고립무원의&amp;nbsp;설원에서,&amp;nbsp;티모시는&amp;nbsp;문득&amp;nbsp;고개를&amp;nbsp;꺾어&amp;nbsp;흐릿한&amp;nbsp;밤하늘을&amp;nbsp;올려다보며&amp;nbsp;입김을&amp;nbsp;희게&amp;nbsp;쏟았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r /&gt;&amp;ldquo;내가&amp;nbsp;아직&amp;nbsp;싫었으면&amp;nbsp;말을&amp;nbsp;하지&amp;hellip;&amp;hellip;.&amp;rdquo; &lt;br /&gt;돌아오는&amp;nbsp;답은&amp;nbsp;없었다.&amp;nbsp;뻗어나가던&amp;nbsp;입김이&amp;nbsp;축축&amp;nbsp;늘어지는&amp;nbsp;꼴을&amp;nbsp;보면서&amp;nbsp;그는&amp;nbsp;한&amp;nbsp;번&amp;nbsp;더&amp;nbsp;덧붙였다.&amp;nbsp;&amp;ldquo;저녁도&amp;nbsp;안&amp;nbsp;주고&amp;nbsp;부려&amp;nbsp;먹네.&amp;rdquo;&amp;nbsp;&amp;ldquo;시끄러워.&amp;rdquo;&amp;nbsp;그제야&amp;nbsp;돌아온&amp;nbsp;말소리는&amp;nbsp;매섭다.&amp;nbsp;머쓱할수록&amp;nbsp;사납게&amp;nbsp;구는&amp;nbsp;그녀의&amp;nbsp;천성이&amp;nbsp;새삼&amp;nbsp;우스웠다.&amp;nbsp;짤막한&amp;nbsp;웃음을&amp;nbsp;흘리는&amp;nbsp;입매로&amp;nbsp;옅은&amp;nbsp;눈송이&amp;nbsp;하나&amp;nbsp;흩어져&amp;nbsp;들어와&amp;nbsp;빠르게&amp;nbsp;녹아내렸다. &lt;br /&gt;그가&amp;nbsp;가로등&amp;nbsp;아래서&amp;nbsp;한&amp;nbsp;대&amp;nbsp;피우는&amp;nbsp;동안&amp;nbsp;나카에는&amp;nbsp;빠르게&amp;nbsp;저녁을&amp;nbsp;사러&amp;nbsp;다녀왔다.&amp;nbsp;이런&amp;nbsp;때&amp;nbsp;장사를&amp;nbsp;할&amp;nbsp;만한&amp;nbsp;가게는&amp;nbsp;뻔했고,&amp;nbsp;돌아오는&amp;nbsp;여자의&amp;nbsp;손목에는&amp;nbsp;딤섬&amp;nbsp;담긴&amp;nbsp;봉투가&amp;nbsp;걸려&amp;nbsp;있었다.&amp;nbsp;김이&amp;nbsp;모락모락&amp;nbsp;났다.&amp;nbsp;&amp;ldquo;냄새&amp;nbsp;때문에&amp;nbsp;걸리게&amp;nbsp;생겼네.&amp;rdquo;&amp;nbsp;불평은&amp;nbsp;여자의&amp;nbsp;입에서&amp;nbsp;떨어졌다.&amp;nbsp;티모시는&amp;nbsp;다시&amp;nbsp;한&amp;nbsp;차례&amp;nbsp;소리내어&amp;nbsp;웃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r /&gt;기상이변으로&amp;nbsp;인한&amp;nbsp;단축근무&amp;nbsp;때문으로&amp;nbsp;본청은&amp;nbsp;평소보다는&amp;nbsp;한산했다.&amp;nbsp;그렇다&amp;nbsp;하더라도&amp;nbsp;갖가지&amp;nbsp;부서가&amp;nbsp;난립하는&amp;nbsp;마당에&amp;nbsp;소란이&amp;nbsp;일기도&amp;nbsp;부지기수였으므로,&amp;nbsp;두&amp;nbsp;사람은&amp;nbsp;외진&amp;nbsp;통로를&amp;nbsp;골라&amp;nbsp;걸었다.&amp;nbsp;보안을&amp;nbsp;파훼하자고&amp;nbsp;두른&amp;nbsp;주문만도&amp;nbsp;몸을&amp;nbsp;겹겹이&amp;nbsp;에워싸&amp;nbsp;대기&amp;nbsp;중&amp;nbsp;마법의&amp;nbsp;밀도에&amp;nbsp;숨이&amp;nbsp;약간&amp;nbsp;갑갑할&amp;nbsp;정도였다.&amp;nbsp;추적방지술&amp;nbsp;대개는&amp;nbsp;학창&amp;nbsp;시절&amp;nbsp;배운&amp;nbsp;주문의&amp;nbsp;변형이다.&amp;nbsp;전쟁을&amp;nbsp;치르면서&amp;nbsp;주문을&amp;nbsp;거듭&amp;nbsp;고쳐나갔다.&amp;nbsp;누군가&amp;nbsp;세세히&amp;nbsp;일러주지&amp;nbsp;않아도&amp;nbsp;나카에는&amp;nbsp;주문의&amp;nbsp;어디를&amp;nbsp;어떻게&amp;nbsp;고쳐나가야&amp;nbsp;하는지&amp;nbsp;저&amp;nbsp;알아서&amp;nbsp;빠르게&amp;nbsp;깨달았다.&amp;nbsp;사격&amp;nbsp;훈련을&amp;nbsp;받을&amp;nbsp;때&amp;nbsp;자연히&amp;nbsp;총기를&amp;nbsp;어떻게&amp;nbsp;고쳐잡아야&amp;nbsp;하는지&amp;nbsp;감각했던&amp;nbsp;것처럼.&amp;nbsp;훈련장의&amp;nbsp;일등은&amp;nbsp;떼어&amp;nbsp;놓은&amp;nbsp;당상이었고&amp;hellip;&amp;hellip;&amp;nbsp;그녀는&amp;nbsp;총구를&amp;nbsp;겨누듯&amp;nbsp;지팡이의&amp;nbsp;끝을&amp;nbsp;티모시에게&amp;nbsp;향했다.&amp;nbsp;목표는&amp;nbsp;냉담하게&amp;nbsp;투항했다.&amp;nbsp;마법이&amp;nbsp;그의&amp;nbsp;목울대&amp;nbsp;앞을&amp;nbsp;빠르게&amp;nbsp;그었을&amp;nbsp;때,&amp;nbsp;그는&amp;nbsp;더없이&amp;nbsp;순순한&amp;nbsp;태도로&amp;nbsp;턱을&amp;nbsp;약간&amp;nbsp;들어&amp;nbsp;보이기도&amp;nbsp;했다.&amp;nbsp;&amp;ldquo;왜?&amp;rdquo;&amp;nbsp;나카에의&amp;nbsp;시선이&amp;nbsp;길어지자&amp;nbsp;남자가&amp;nbsp;뜻&amp;nbsp;없이&amp;nbsp;물었다.&amp;nbsp;&amp;ldquo;아니.&amp;rdquo;&amp;nbsp;여자는&amp;nbsp;아랫입술을&amp;nbsp;지그시&amp;nbsp;물었다&amp;nbsp;놓으며&amp;nbsp;돌아선다.&amp;nbsp;열&amp;nbsp;감지를&amp;nbsp;피해&amp;nbsp;가며&amp;nbsp;두&amp;nbsp;사람은&amp;nbsp;마침내&amp;nbsp;인적&amp;nbsp;드문&amp;nbsp;지하의&amp;nbsp;영안실로&amp;nbsp;내려섰다.&amp;nbsp;안치실로&amp;nbsp;들어서자&amp;nbsp;삽시간에&amp;nbsp;건물&amp;nbsp;내부에서&amp;nbsp;바깥으로&amp;nbsp;도로&amp;nbsp;내팽겨쳐진&amp;nbsp;듯&amp;nbsp;끔찍이도&amp;nbsp;추웠다.&amp;nbsp;나카에는&amp;nbsp;무심코&amp;nbsp;몸을&amp;nbsp;떨고는&amp;nbsp;주문&amp;nbsp;몇&amp;nbsp;개를&amp;nbsp;거두고&amp;nbsp;대신&amp;nbsp;보온&amp;nbsp;마법을&amp;nbsp;둘렀다.&amp;nbsp;티모시는&amp;nbsp;봉투를&amp;nbsp;건네받아&amp;nbsp;그&amp;nbsp;안을&amp;nbsp;잠깐&amp;nbsp;뒤적거리다가&amp;nbsp;입맛을&amp;nbsp;잃은&amp;nbsp;얼굴로&amp;nbsp;주변만&amp;nbsp;둘러보았다.&amp;nbsp;식은&amp;nbsp;딤섬은&amp;nbsp;그렇게&amp;nbsp;구석에&amp;nbsp;놓였다.&amp;nbsp;&amp;ldquo;그래서&amp;nbsp;내가&amp;nbsp;만나야&amp;nbsp;할&amp;nbsp;사람은&amp;nbsp;누구야?&amp;rdquo;&amp;nbsp;그가&amp;nbsp;물었을&amp;nbsp;때&amp;nbsp;여자는&amp;nbsp;이미&amp;nbsp;격실의&amp;nbsp;명패를&amp;nbsp;쭉&amp;nbsp;훑고&amp;nbsp;있었다.&amp;nbsp;한&amp;nbsp;곳에&amp;nbsp;다다라&amp;nbsp;그녀는&amp;nbsp;마침내&amp;nbsp;자기가&amp;nbsp;늦지&amp;nbsp;않았음을&amp;nbsp;알게&amp;nbsp;되었다.&amp;nbsp;아직&amp;nbsp;부검실로&amp;nbsp;송치되지&amp;nbsp;않은&amp;nbsp;시신이&amp;nbsp;거기&amp;nbsp;있었다.&amp;nbsp;명패에는&amp;nbsp;이름&amp;nbsp;대신&amp;nbsp;사건&amp;nbsp;번호가&amp;nbsp;걸려&amp;nbsp;있었다. &lt;br /&gt;&lt;br /&gt;형사는&amp;nbsp;전직&amp;nbsp;군의관을&amp;nbsp;쓸데없이&amp;nbsp;방해하지&amp;nbsp;않기로&amp;nbsp;했다.&amp;nbsp;남자가&amp;nbsp;마침내&amp;nbsp;검시대에서&amp;nbsp;몸을&amp;nbsp;일으키기로&amp;nbsp;할&amp;nbsp;때는,&amp;nbsp;천장의&amp;nbsp;옅은&amp;nbsp;미백색&amp;nbsp;조명이&amp;nbsp;그의&amp;nbsp;정수리&amp;nbsp;위에서&amp;nbsp;동그랗게&amp;nbsp;비추어&amp;nbsp;내리고&amp;nbsp;있었다.&amp;nbsp;그는&amp;nbsp;기도를&amp;nbsp;마친&amp;nbsp;신자처럼&amp;nbsp;몸을&amp;nbsp;거뒀다.&amp;nbsp;&amp;ldquo;너무&amp;nbsp;평범해.&amp;rdquo;&amp;nbsp;건조한&amp;nbsp;성음보다도&amp;nbsp;서늘한&amp;nbsp;안색이&amp;nbsp;무감동하게&amp;nbsp;시신&amp;nbsp;위를&amp;nbsp;훑어내렸다.&amp;nbsp;&amp;ldquo;발견했을&amp;nbsp;땐&amp;nbsp;거꾸로&amp;nbsp;매달려&amp;nbsp;있었지?&amp;nbsp;사지&amp;nbsp;말단과&amp;nbsp;하지가&amp;nbsp;푸른&amp;nbsp;건&amp;nbsp;산소가&amp;nbsp;공급되지&amp;nbsp;않아서&amp;nbsp;그래.&amp;nbsp;혈관이&amp;nbsp;수축해서&amp;nbsp;경과가&amp;nbsp;더&amp;nbsp;빨랐군.&amp;nbsp;상체에&amp;nbsp;울혈이&amp;nbsp;심해.&amp;nbsp;두경부&amp;nbsp;내압&amp;nbsp;때문에&amp;nbsp;눈이&amp;nbsp;거의&amp;nbsp;밀려&amp;nbsp;나왔고.&amp;rdquo;&amp;nbsp;&amp;ldquo;사인은?&amp;rdquo;&amp;nbsp;&amp;ldquo;저산소성&amp;nbsp;뇌&amp;nbsp;손상.&amp;nbsp;아슬아슬했지.&amp;nbsp;더&amp;nbsp;버텼으면&amp;nbsp;동사했을&amp;nbsp;거야.&amp;rdquo;&amp;nbsp;티모시가&amp;nbsp;장갑을&amp;nbsp;벗으면서&amp;nbsp;덧붙였다.&amp;nbsp;&amp;ldquo;더&amp;nbsp;자세한&amp;nbsp;건&amp;nbsp;개복을&amp;nbsp;해봐야&amp;nbsp;알겠군.&amp;rdquo;&amp;nbsp;나카에가&amp;nbsp;반&amp;nbsp;바퀴를&amp;nbsp;돌아서&amp;nbsp;검시대의&amp;nbsp;가장자리를&amp;nbsp;짚었다.&amp;nbsp;남자의&amp;nbsp;손과&amp;nbsp;가까웠다.&amp;nbsp;&amp;ldquo;그런데&amp;nbsp;왜&amp;nbsp;관심을&amp;nbsp;둔&amp;nbsp;거야.&amp;nbsp;타살이라고&amp;nbsp;생각해?&amp;rdquo;&amp;nbsp;남자가&amp;nbsp;손날이&amp;nbsp;마주&amp;nbsp;붙는&amp;nbsp;것을&amp;nbsp;피하지&amp;nbsp;않고&amp;nbsp;물었다.&amp;nbsp;&amp;ldquo;글쎄.&amp;nbsp;최근에&amp;nbsp;유사한&amp;nbsp;케이스가&amp;nbsp;자주&amp;nbsp;발견되거든.&amp;rdquo;&amp;nbsp;&amp;ldquo;흐음.&amp;rdquo;&amp;nbsp;&amp;ldquo;머리&amp;nbsp;좋은&amp;nbsp;녀석이&amp;nbsp;자살을&amp;nbsp;꾸며내고&amp;nbsp;있거나&amp;nbsp;집단&amp;nbsp;자살을&amp;nbsp;조장한다는&amp;nbsp;가능성에&amp;nbsp;대해서&amp;nbsp;생각&amp;nbsp;중이야.&amp;rdquo;&amp;nbsp;&amp;ldquo;거꾸로&amp;nbsp;매달린&amp;nbsp;남자는&amp;nbsp;순교나&amp;nbsp;정화의&amp;nbsp;의식을&amp;nbsp;상징하지.&amp;rdquo;&amp;nbsp;여자의&amp;nbsp;손이&amp;nbsp;그의&amp;nbsp;손&amp;nbsp;위로&amp;nbsp;겹쳐졌다.&amp;nbsp;남자는&amp;nbsp;겹쳐&amp;nbsp;쥔&amp;nbsp;사나운&amp;nbsp;손등을&amp;nbsp;내려다보며&amp;nbsp;계속&amp;nbsp;말했다.&amp;nbsp;&amp;ldquo;때로&amp;nbsp;그&amp;nbsp;상징의&amp;nbsp;대상이&amp;nbsp;이교가&amp;nbsp;되기도&amp;nbsp;하고.&amp;nbsp;어느&amp;nbsp;쪽이건,&amp;nbsp;이&amp;nbsp;나라에서&amp;nbsp;그렇게&amp;nbsp;드물지&amp;nbsp;않아.&amp;rdquo;&amp;nbsp;&amp;ldquo;뭐가.&amp;nbsp;집단&amp;nbsp;광기?&amp;rdquo;&amp;nbsp;여자가&amp;nbsp;입을&amp;nbsp;벌려&amp;nbsp;낮게&amp;nbsp;묻자&amp;nbsp;하얀&amp;nbsp;입김이&amp;nbsp;진눈처럼&amp;nbsp;흩날렸다.&amp;nbsp;지하의&amp;nbsp;밀폐된&amp;nbsp;안치소는&amp;nbsp;어느새&amp;nbsp;공기가&amp;nbsp;약간&amp;nbsp;부족했다.&amp;nbsp;티모시는&amp;nbsp;미약한&amp;nbsp;어지러움을&amp;nbsp;느끼며&amp;nbsp;고쳐&amp;nbsp;말했다.&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r /&gt;&amp;ldquo;맹신.&amp;rdquo; &lt;br /&gt;&amp;ldquo;입&amp;nbsp;벌려&amp;nbsp;봐.&amp;rdquo; &lt;br /&gt;순간&amp;nbsp;헷갈렸다.&amp;nbsp;그는&amp;nbsp;무언가&amp;nbsp;물을&amp;nbsp;것처럼&amp;nbsp;입을&amp;nbsp;뗐다가,&amp;nbsp;곧&amp;nbsp;여자가&amp;nbsp;시체를&amp;nbsp;곁눈질하는&amp;nbsp;것을&amp;nbsp;알아챘다.&amp;nbsp;그는&amp;nbsp;붙들렸던&amp;nbsp;손을&amp;nbsp;빼서&amp;nbsp;다시&amp;nbsp;검시용&amp;nbsp;장갑을&amp;nbsp;꼈다.&amp;nbsp;나카에의&amp;nbsp;손은&amp;nbsp;잠시&amp;nbsp;허공에&amp;nbsp;머물다가&amp;nbsp;느리게&amp;nbsp;내려앉았다.&amp;nbsp;습기가&amp;nbsp;밴&amp;nbsp;손은&amp;nbsp;라텍스&amp;nbsp;장갑에&amp;nbsp;어렵게&amp;nbsp;껴들어갔지만,&amp;nbsp;티모시의&amp;nbsp;손은&amp;nbsp;능숙했다.&amp;nbsp;남자는&amp;nbsp;곧&amp;nbsp;눈&amp;nbsp;감은&amp;nbsp;시신의&amp;nbsp;아랫입술을&amp;nbsp;엄지로&amp;nbsp;가볍게&amp;nbsp;쓸어&amp;nbsp;입을&amp;nbsp;열었다.&amp;nbsp;하악은&amp;nbsp;뻣뻣하게&amp;nbsp;벌어졌다.&amp;nbsp;&amp;ldquo;자국이&amp;nbsp;남았네.&amp;rdquo;&amp;nbsp;그는&amp;nbsp;언제&amp;nbsp;다른&amp;nbsp;데&amp;nbsp;관심을&amp;nbsp;두었냐는&amp;nbsp;듯&amp;nbsp;금방&amp;nbsp;집중했다.&amp;nbsp;&amp;ldquo;데이고&amp;nbsp;눌렸어.&amp;nbsp;혓바늘도&amp;nbsp;입천장도&amp;nbsp;상태가&amp;nbsp;심해서&amp;nbsp;뭐였는지&amp;nbsp;원래&amp;nbsp;모양을&amp;nbsp;알아보기는&amp;nbsp;힘들&amp;nbsp;수&amp;nbsp;있겠어.&amp;rdquo;&amp;nbsp;그리고&amp;nbsp;곧장&amp;nbsp;고쳤다.&amp;nbsp;&amp;ldquo;아니,&amp;nbsp;명확한데.&amp;nbsp;십자가군.&amp;rdquo;&amp;nbsp;티모시가&amp;nbsp;눈을&amp;nbsp;떼고&amp;nbsp;나카에의&amp;nbsp;눈을&amp;nbsp;마주&amp;nbsp;봤다.&amp;nbsp;&amp;ldquo;불에&amp;nbsp;달군&amp;nbsp;쇠십자가야.&amp;rdquo;&amp;nbsp;&amp;ldquo;지금&amp;nbsp;물품보관소에&amp;nbsp;잠들어&amp;nbsp;있어.&amp;rdquo;&amp;nbsp;&amp;ldquo;그럼&amp;nbsp;그&amp;nbsp;쇠십자가를&amp;nbsp;어디서&amp;nbsp;찍어내는&amp;nbsp;건지&amp;nbsp;알아내면&amp;nbsp;되는&amp;nbsp;거잖아?&amp;rdquo;&amp;nbsp;묻는&amp;nbsp;남자의&amp;nbsp;시선이&amp;nbsp;물끄러미&amp;nbsp;길어졌다.&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nbsp;&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amp;ldquo;나한테&amp;nbsp;왜&amp;nbsp;보여줬어?&amp;rdquo; &lt;br /&gt;&amp;ldquo;알고&amp;nbsp;싶었나&amp;nbsp;본데.&amp;rdquo; &lt;br /&gt;&amp;ldquo;뭐가.&amp;rdquo; &lt;br /&gt;&amp;ldquo;맹신이&amp;nbsp;어떻게&amp;nbsp;태어나는&amp;nbsp;건지.&amp;rdquo; &lt;br /&gt;&amp;ldquo;그리고.&amp;rdquo; &lt;br /&gt;&amp;ldquo;네&amp;nbsp;맹신은&amp;nbsp;어떻게&amp;nbsp;생겨먹은&amp;nbsp;건지.&amp;rdquo; &lt;br /&gt;&amp;ldquo;그래서&amp;nbsp;순교하라고?&amp;rdquo; &lt;br /&gt;&amp;ldquo;지랄해달라며.&amp;rdquo; &lt;br /&gt;이쯤&amp;nbsp;여자가&amp;nbsp;웃었다.&amp;nbsp;그리고&amp;nbsp;아무렇지&amp;nbsp;않게&amp;nbsp;덧붙였다.&amp;nbsp;안&amp;nbsp;되나. &lt;br /&gt;&amp;ldquo;글쎄.&amp;nbsp;네가&amp;nbsp;내&amp;nbsp;죄목도&amp;nbsp;하얗게&amp;nbsp;덮어주고.&amp;nbsp;좆같이&amp;nbsp;살지&amp;nbsp;말라고&amp;nbsp;거둬서&amp;nbsp;먹이고&amp;nbsp;재우고.&amp;nbsp;여러&amp;nbsp;모로&amp;nbsp;구원&amp;nbsp;베풀었다고&amp;nbsp;한다면&amp;nbsp;그건&amp;nbsp;그거대로&amp;nbsp;맞는데.&amp;rdquo; &lt;br /&gt;&amp;ldquo;존나게&amp;nbsp;많이도&amp;nbsp;베풀었네,&amp;nbsp;새삼&amp;hellip;&amp;hellip;.&amp;rdquo; &lt;br /&gt;&amp;ldquo;네가&amp;nbsp;내&amp;nbsp;종교는&amp;nbsp;아니지.&amp;rdquo; &lt;br /&gt;&amp;ldquo;그렇겠지,&amp;nbsp;등신아.&amp;rdquo; &lt;br /&gt;여자는&amp;nbsp;남자의&amp;nbsp;손목을&amp;nbsp;붙들고&amp;nbsp;그의&amp;nbsp;장갑을&amp;nbsp;벗겨냈다.&amp;nbsp;티모시의&amp;nbsp;손바닥에&amp;nbsp;고인&amp;nbsp;그녀의&amp;nbsp;손가락은&amp;nbsp;사납고&amp;nbsp;싸늘하다.&amp;nbsp;거센&amp;nbsp;눈&amp;nbsp;폭풍&amp;nbsp;같다.&amp;nbsp;&amp;ldquo;난&amp;nbsp;그냥&amp;nbsp;네가&amp;nbsp;데였으면&amp;nbsp;할&amp;nbsp;뿐이야.&amp;rdquo;&amp;nbsp;너무&amp;nbsp;차가워도&amp;nbsp;살갗에&amp;nbsp;화상을&amp;nbsp;입힌다나. &lt;br /&gt;&lt;br /&gt;방치된&amp;nbsp;채&amp;nbsp;누워있는&amp;nbsp;시신을&amp;nbsp;뒤로&amp;nbsp;하고&amp;nbsp;그들의&amp;nbsp;입술이&amp;nbsp;젖은&amp;nbsp;소리를&amp;nbsp;내며&amp;nbsp;달라붙었다.&amp;nbsp;침략의&amp;nbsp;의지는&amp;nbsp;양편&amp;nbsp;모두에&amp;nbsp;고스란히&amp;nbsp;깃들어있었다.&amp;nbsp;둘&amp;nbsp;중&amp;nbsp;누구도&amp;nbsp;침략당하고&amp;nbsp;싶지&amp;nbsp;않았고,&amp;nbsp;주도권을&amp;nbsp;넘겨주고&amp;nbsp;싶지도&amp;nbsp;않았다.&amp;nbsp;호흡은&amp;nbsp;거칠게&amp;nbsp;섞였다.&amp;nbsp;여자의&amp;nbsp;혀가&amp;nbsp;강하게&amp;nbsp;점막을&amp;nbsp;짓누르며&amp;nbsp;그를&amp;nbsp;범할&amp;nbsp;때면,&amp;nbsp;그의&amp;nbsp;혀는&amp;nbsp;능숙하게&amp;nbsp;농탕질을&amp;nbsp;치면서&amp;nbsp;여자의&amp;nbsp;입안을&amp;nbsp;더럽혔다.&amp;nbsp;입맞춤은&amp;nbsp;길어질수록&amp;nbsp;점점&amp;nbsp;그&amp;nbsp;모양이&amp;nbsp;거리의&amp;nbsp;눈&amp;nbsp;녹는&amp;nbsp;것과&amp;nbsp;같았다.&amp;nbsp;찰나에만&amp;nbsp;순전히&amp;nbsp;희었다가,&amp;nbsp;곧&amp;nbsp;흙발에&amp;nbsp;짓이기고&amp;nbsp;채여&amp;nbsp;지저분했다.&amp;nbsp;질척였다.&amp;nbsp;희고&amp;nbsp;더러운&amp;nbsp;자리를&amp;nbsp;조금도&amp;nbsp;분간할&amp;nbsp;수가&amp;nbsp;없었다. &lt;br /&gt;이교도가&amp;nbsp;신을&amp;nbsp;섬김이&amp;nbsp;이러할까.&lt;/p&gt;
&lt;p data-ke-size=&quot;size16&quot;&gt;&lt;br /&gt;신앙을&amp;nbsp;모르는&amp;nbsp;여자가&amp;nbsp;그렇게&amp;nbsp;의문하며&amp;nbsp;물러나려는&amp;nbsp;때였다.&amp;nbsp;타인의&amp;nbsp;입안을&amp;nbsp;덥혔다가&amp;nbsp;아쉽게&amp;nbsp;문지르며&amp;nbsp;빠져나가려는&amp;nbsp;순간.&amp;nbsp;&amp;ldquo;아!&amp;rdquo;&amp;nbsp;화끈하고&amp;nbsp;아릿한&amp;nbsp;통증이&amp;nbsp;들이닥쳤다.&amp;nbsp;혀를&amp;nbsp;깨문&amp;nbsp;통증은&amp;nbsp;금세&amp;nbsp;뿌리까지&amp;nbsp;번졌다.&amp;nbsp;나카에의&amp;nbsp;눈꼬리가&amp;nbsp;축축하게&amp;nbsp;젖어들었다.&amp;nbsp;&amp;lsquo;물었어?&amp;nbsp;네가&amp;nbsp;개야?&amp;rsquo;&amp;nbsp;그녀가&amp;nbsp;눈빛으로&amp;nbsp;추궁했다.&amp;nbsp;&amp;ldquo;물고&amp;nbsp;있어야&amp;nbsp;하잖아.&amp;rdquo;&amp;nbsp;티모시가&amp;nbsp;능수능란하게&amp;nbsp;답했다.&amp;nbsp;&amp;ldquo;그래야&amp;nbsp;두려움도&amp;nbsp;잊고&amp;nbsp;죽음을&amp;nbsp;견디지.&amp;rdquo;&amp;nbsp;그녀가&amp;nbsp;무언가&amp;nbsp;중얼거렸는데&amp;nbsp;(&amp;lsquo;개새끼&amp;rsquo;라고&amp;nbsp;하기엔&amp;nbsp;발음이&amp;nbsp;터무니없이&amp;nbsp;어설펐다)&amp;nbsp;짜증스럽게&amp;nbsp;뱉는&amp;nbsp;욕인지&amp;nbsp;아니면&amp;nbsp;평상시&amp;nbsp;하는&amp;nbsp;대로&amp;nbsp;단순한&amp;nbsp;부름인지&amp;nbsp;몰랐다.&amp;nbsp;남자는&amp;nbsp;알아들었으면서&amp;nbsp;뭐라고&amp;nbsp;했는지&amp;nbsp;되물었고,&amp;nbsp;그녀는&amp;nbsp;자리를&amp;nbsp;정리하는&amp;nbsp;동안&amp;nbsp;그를&amp;nbsp;오롯이&amp;nbsp;무시했다.&amp;nbsp;티모시는&amp;nbsp;그녀가&amp;nbsp;또&amp;nbsp;우스워졌고,&amp;nbsp;그가&amp;nbsp;남긴&amp;nbsp;통증은&amp;nbsp;그래서&amp;nbsp;물고&amp;nbsp;죽을&amp;nbsp;만큼&amp;nbsp;뜨거운지&amp;nbsp;묻고&amp;nbsp;싶었다.&amp;nbsp;그러나&amp;nbsp;저녁을&amp;nbsp;거른&amp;nbsp;마당에&amp;nbsp;배가&amp;nbsp;고팠고,&amp;nbsp;눈발을&amp;nbsp;헤치며&amp;nbsp;길을&amp;nbsp;뚫고&amp;nbsp;가는&amp;nbsp;건&amp;nbsp;그것만으로&amp;nbsp;충분히&amp;nbsp;진&amp;nbsp;빠지는&amp;nbsp;일이었기&amp;nbsp;때문에&amp;nbsp;길게&amp;nbsp;투닥거리고&amp;nbsp;싶지&amp;nbsp;않았다.&amp;nbsp;그래서&amp;nbsp;그들이&amp;nbsp;집으로&amp;nbsp;돌아갈&amp;nbsp;때까지만&amp;nbsp;참기로&amp;nbsp;했다.&amp;nbsp;&amp;lt;完&amp;gt;&lt;/p&gt;</description>
      <author>짼젤</author>
      <guid isPermaLink="true">https://chae-back.tistory.com/1</guid>
      <comments>https://chae-back.tistory.com/1#entry1comment</comments>
      <pubDate>Tue, 29 Jul 2025 05:18:41 +0900</pubDate>
    </item>
  </channel>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