悩め、 生きて, 怪物達よ

悩め、 生きて, 怪物達よ

2025. 11. 20. 05:21

반나절하고도 아홉 시간 전부터 유럽에 닥친 폭설은 갑작스러웠고 동시에 모든 일정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기상 악화가 지난할 것을 감지한 항공사들은 전광판을 통해 앞다퉈 기약 없는 연착을 알렸으며 이미 하루가 지난 기체는 결항 알림을 띄워놓기도 했다. 그칠 기미가 없어 보이는 눈보라에 공항 내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여기저기서 분노에 젖은 항의의 목소리가 들렸고 어딘가에서는 급히 전화를 걸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성토하기에 바빴다. 여러 소음이 섞여 이젠 거의 아마추어 하모니처럼 들렸다.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사정을 묻지 않았고 궁금해하지 않았다. 대도시의 사람은 대체로 주위를 둘러볼 여유 따위가 없다. 티모시는 피곤에 젖은 눈을 부비며 이 모든 상황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꽤 인위적인 장면이 아닌가? 나는 도피를 하고 있고, 잃어버린 우산에 개판인 날씨까지 수많은 요소가 앞길을 막고 있다. 겨우 입에 밀어 넣으려던 빵쪼가리마저 한 남성과 부딪치는 바람에 공항의 시린 바닥에 반납하고서야 확신했다. 이건 그냥 돌아가라는 신의 계시인지도 몰라. 신앙심이 깊은 것도 아니었지만, 애초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마는 오늘만큼은 왜인지 그의 진언에 동조해도 좋겠다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게 돌아갈 곳이 있었던가……. 멍이 든 복부 근처가 욱신거렸다. 티모시는 그 부근을 뭉근히 문질렀다. 통각에 현실감이 일부 복귀했다. 나이가 들며 늘어가는 건 쓸데없는 잡생각뿐이다. 한참 전광판을 들여다보던 나카에가 티모시의 멀쩡한 팔뚝을 당긴다.

 

야. 멍때리지 말고 따라와. 잃어버리면 답도 없어.

티모시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인다. 응. 나카에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두 발짝 앞서 걸어간다. 그건 동행인이 당연히 자신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이 담긴 걸음걸이였다. 티모시는 그를 배신하지 않고 뒤따른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만들면 된다. 인정하기까지 길고 긴 시간이 걸렸지만, 솔직히 고하자면 지금도 인정한 적 없는 소리지만, 그래. 확신한다. 그건 아주 간단한 로직이었다.

비행기가 뜬 건 기적이었다. 겨우 이륙을 감행한 두 기체가 풍향 탓에 별 소득 없이 회항하고, 그로 인해 같은 활주로를 사용해야 하는 비행편은 또다시 미뤄졌고, 그들 역시 좁아터진 비행기에 나란히 앉아 한 시간을 대기했으며, 티모시가 미동도 없는 창문 밖을 열네 번 내다보았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비행이었다. 나카에는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사람치고 차분해 보였다. 그러니까…… 티모시의 의학적 소견에 빗대자면,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는 의미다. 기체에 몸을 실은 순간부터 나카에는 손톱 거스러미를 뜯지도 않았고 병적으로 다리를 떨지도 않았으며 그저 기내 상품 카탈로그를 넘겨볼 뿐이었다. 그의 손길은 면세 품목에서 멈추었다. 아마 담배겠지. 좁아터진 이코노미석은 반올림하면 이 미터 수준인 몸에 걸맞지 않아 조금 뒤척였다. 나카에는 아주 기민하게도 티모시의 움직임을 감지했지만 그는 시선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아직 덜 아문 상완이 거슬렸다. 티모시의 몸은 여전히 하자투성이였다.

 

나카에는 오를리Orly에서 하네다Haneda로 향하는 직항편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파리에서 밀라노까지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했다. 급하게 구한 좌석은 지금 앉은 이코노미석 못지않게 좁아터졌지만 아무도 그들의 신원에 대해 질문하지 않았다. 이 열차 내부에 수배자가 자신들뿐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아주 제 집인양 잠에 든 티모시를 깨우는 데만 십 분을 써야 했다. 결국 자리 아래로 굴러떨어진 채 눈을 뜬 티모시는 세수도 못 하고 주차장 구석으로 끌려갔다. 나카에는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중형 SUV의 운전석을 열었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문은 쉽게 열렸고, 내부에는 온기가 감돌았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배웅이라도 하러 간 모양이지. 그러나 이 전쟁 같은 유럽에서 그런 온기는 존중받지 못한다. 티모시를 조수석에 처박은 나카에는 운전석의 의자를 제게 맞추어 조정하고 글러브박스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좋은 게 있잖아. 중얼거리며 티모시의 눈가에 씌운다. 그건 마치 제 것처럼 어울렸다.

 

그게 바로 지금 티모시의 흰 티셔츠에 달랑 매달린 브랜드 선글라스의 정체다. 이 비행기에 도달하기까지 잘라버린 면허증이 하나, 신분증이 넷, 일본에 도착한다면 여권이 둘이었다. 나카에는 긴 비행에 승무원이 건넨 플라스틱 컵 두 개를 받아들었다. 내부에는 와인이 담겨 있었고, 나카에는 두 잔을 전부 티모시에게 넘겼다. 그리고 아래를 받치고 있던 휴지에 두 단어를 휘갈겼다. なかえ. ゆり. 둥글게 그려지는 게 잠깐 들여다보아도 일본어였다. 심을 집어넣지 않은 볼펜이 단어 위를 툭툭 치고 지나갔다. 티모시의 시선은 단어보다 나카에의 소소한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고 있기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네가 읽어야 하는 단어는 이 두 개가 다야. 나카에. 유리.

그래. 이건 네 이름이고, 다음 건 뭔데?

전부 네 이름.

뭐?

직업은 의사. 이름은 나카에 유리. 읽기 편한 걸로 골라줬는데 뭐가 문제야?

그러니까……. 왜 나카에?

생판 남이랑 산다는데 이상한 소문이 안 나겠어? 그 보수적인 동네에서?

 

가본 적도 없는 동네가 보수적인지 진보적인지 그따위 걸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덤벼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런 성격이 못 되었다. 티모시는 조금은 맹한 얼굴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는 제 손에 들린 여권에 적힌 이름佐藤 勇利이 나카에가 가르쳐준 이름과 다르다는 사실도 몰랐다. 어차피 행정 절차가 끝난다면 서로가 서로를 뭐라고 부르건, 타인에게 자신을 뭐라고 소개하건 이름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카에는 티모시가 제 글씨에서 시선을 뗄 때쯤에야 휴지를 찢기 시작했다. 상술한 사유로 성 따위는 없어도 좋았다. 그러나 이름을 버릴지 말지에 관한 건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니 티모시에게 자신의 흔적을 떠넘긴다. 그는 제 결정에 반기를 들지 않을 것이다.

나카에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휴지를 조각냈다. 그리고 마시지 않은 와인이 삼 분의 이쯤 담긴 컵에 휴짓조각을 밀어 넣었다. 붉은빛 액체를 타고 수용성 잉크가 번져나간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승무원은 그 모습을 보고 아주 질색했다. 승무원이 쓰레기가 된 컵을 정리하는 동안 그는 개의치 않고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는다. 이제 흔적이라면 적게 남을수록 좋았다.

 

 

悩め、 生きて, 怪物達よ

 

이제 실내에서 한텐을 챙겨 입는 일에 익숙해진 티모시에게는 작은 버릇이 하나 생겼다. 그는 오후 세 시가 되면 담뱃갑을 챙긴 채 추위를 감수한 채 크게 난 베란다 문을 열어젖힌다. 건물이 실내 흡연 가능 맨션이라는 것에 흥미를 보인 건 나카에였지만, 자주 집에 붙어있는 건 그보다 티모시였으므로 나카에만의 버릇이었던 실내 흡연은 그에게도 옮겨붙었다. 그럼에도 다다미 바닥은 담뱃재에 취약했고, 일본의 벽지나 바닥재는 한순간에 담배 냄새에 찌드는 모양이므로 방에서 담배를 태우는 무뢰배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는 베란다 문을 단단히 잠근 채로 담배 한 대를 빼어 물었다. 찬 바람이 부스스한 머리칼을 한바탕 뒤집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바람에 라이터 불이 아스러질까 소중하게 막은 채 담뱃불을 댈 뿐이다. 동시에 주머니에 대충 넣었던 휴대전화가 타일 바닥으로 추락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기껏해야 금이 조금 갔을 테지. 어차피 와이파이를 연결해 두지 않은 아이폰에는 아무런 알림도 도착하지 않는다. 읽는 법을 모르는 신문과 모르는 말이 쏟아지는 TV를 벗 삼아 집을 지키다 보면 답지 않게 두고 온 것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언어를 배우는 일에 도전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나이가 찰 대로 차다보면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는 곧잘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최근 새 직장을 마련한 나카에에게도 새로운 취미가 하나 생겼다. 아주 먼 곳까지 날아왔음을 알고 있지만, 발각됐다면 이미 발각되고도 남았을 테지만 나카에는 두고 온 마법사를 떠올리고는 했다. 그 복수광은 나카에를 닮았다. 티모시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랬다. 그는 백칠십 대 후반에서 백팔십 대 초반의 신장을 가졌으며 실루엣을 보아하니 꽤 마른 편이었다. 가볍게 흐트러지는 흑발과 붉게 번뜩이는 눈알까지……. 처음 보았을 때 자신의 습격인 줄로만 알았다는 티모시의 우스갯소리를 흘려듣는가 했더니 일본까지 와서도 저 닮은 사람만 보면 개라도 된 듯 졸졸 쫓아고는 했다. 지금까지 폭력이나 마법을 동반한 유혈 사태는 터진 적이 없으나 언제 그 목적지가 정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티모시는 그 목적지가 자신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크게 잘못한 일이 있다기보다는, 지금까지 쌓인 빅데이터가 그랬다. 깊게 숨을 빨아당긴 티모시는 문득 담배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주지를 옮긴 뒤로 정신이 없는 티를 내는 건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 불만 없이 난간에 지져 끈다. 갈무리하지 못한 담뱃재가 한텐 소매에 떨어진다.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네……. 베란다의 잠금장치를 해제하려고 뒤를 돈 티모시는 예상치 못한 불청객을 마주한다. 가까이 달라붙은 옆집 베란다에서부터 뻗어 나온 자그마한 손이 티모시의 휴대전화를 훔치고 있었다. 그는 얇게 눈을 뜨고 소녀의 정체를 가늠한다. 작은 덩치의 도둑은 옆집에 사는 일곱 살배기 여자애였다. 시노나가篠永 카노華乃. 나카에는 복도에서 그 애를 처음 마주친 순간 알아챘다. 부모가 정상은 아니네. 위생 상태를 보아하니 방임이 분명했다. 그들은 카노를 경계하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동류를 보는 마음일까. 혹은 동정의 마음이 아직 남아있나. 하여튼, 학교도 제대로 못 가는 애가 타국어로 설정된 휴대전화를 제대로 뒤질 수 있을 리 없었다. 티모시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손짓했으며, 카노는 휴대전화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화면이 새 알람으로 반짝였다. 액정에는 세로로 큰 금이 가 있었다.

카노에게서는 언제나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함께 거주하는 이가 흡연자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티모시는 카노가 있다고 담배를 끄지 않았다. 그는 그저, 소매가 조금 타들어 간 한텐을 바꾸어 입고, 새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돌아왔다. 여전히 카노는 위태롭게 난간에 매달려 티모시가 불을 붙이는 것을 방관했다. 아이의 목소리는 매일 흡연에 노출된 것치고 여느 아동처럼 통통 튀었다.

 

유리는 왜 매일 여기에 있어?

 

티모시는 그 짧은 말을 알아듣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는 휴대전화를 몇 번 조작하더니 카노에게 내밀었다. 응. 잇새로 호응과도 같은 소리가 샜다. 카노는 눈치도 빠르게 질문을 한 번 더 속삭였다. 일어는 순식간에 영어로 변환되었다. 번역 기능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어순부터 혀를 굴리는 법까지 전부 다른 언어는 몇 번을 들어도 귀에 익질 않았다. 답변은 망설임이 없고, 둘 사이에는 위태롭게 휴대전화가 놓였다. 티모시는 쉬운 단어를 고르기 위해 노력했다. 카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운 번역을 위해서는 간단명료함이 중요했다.

 

친구가 없어서I don't have friends.

나도 그런데私も.

유감이네Too bad.

이제 괜찮아もう大丈夫. 유리는 뭐 때문에 온 거야勇利は何のために来たの?

 

아. 티모시는 번역 기능을 잠시 차단했다. 이런 때에 꼭 하고 싶은 일본어가 있었다. 방랑벽이야放浪癖だよ. 드라마에서 스치듯 나온 말이었다. 티모시에게 한 음절씩 단단히 굳혀 발음하는 버릇은 없었지만 원어민이라면 능숙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짧은 문장이었다. 아이는 수줍게 입을 가리고 조금 웃었다. 나도 여행하고 싶어. 티모시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뉘앙스는 받아들였다. 될 거야できる. 바람을 맞은 목소리가 낮게 갈라진다. 뒤늦게 번역 기능을 가동했으나,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이제 정말 들어가 봐야 했다. 곧 나카에가 돌아온다. 티모시는 아직 일자리를 구하고 있지만-새로 마련한 가짜 학력을 대는 일에도 이제 익숙해졌다- 나카에는 며칠간 발품을 팔더니 금방 사무실 하나를 마련해 흥신소와 닮은 일을 했다. 금전운이라면 타고난 건지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의 사무실에는 꽤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다. 그는 버려진 꽁초를 주워 베란다 구석의 간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자신과 닮은 여자를 보았다는 메시지가 선연했으므로 복귀한 이의 기분이 어떨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카노는 매달린 다리를 가볍게 달랑거렸다. 가벼운 몸체가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만 같았다.

벌써 들어가?

응. 다음에 또 봐.

같이 사는 사람 돌아오는구나. 카노는 그 사람도 궁금한데, 아직 이름도 안 알려주고…….

한텐을 툭툭 털어 담배 냄새를 날려 보낸 티모시는 차근히 말을 고른다. 모를 때가 제일 좋은 거야. 그런 사람은. 상대는 티모시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카노는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둘은 무슨 사이에요? 신경질적으로 열쇠 구멍을 들쑤시는 소리가 베란다까지 들렸다. 티모시는 얇은 검지를 입가에 댄다. 비밀이야秘密. 동시에 현관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