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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고교 짭근 AU 모가미 유리에게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태도가 웃어른의 눈에 버릇없어 보일 것이매 넘어지기 쉬운 버릇이니 교정하는 게 좋다고 하루가 멀다고 지적했으나 유리는 부모의 장례식에서마저 상복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자판기 버튼 두 개를 한 번에 누르는 발랑 까진 아이로 자랐다. 모가미 일가가 파멸을 맞이했을 때 아들은 슬퍼할 틈도 없이 발로 뛰어야만 했다. 쌩쌩한 무릎 관절이 다 나갈 정도로 오래 정좌해야 했고, 이름도 항렬도 심지어는 얼굴도 모르는 친인척-이제 와 회고하건대 그게 정말 혈족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및 지인과 어색한 만남을 가져야 했으며 점점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떠 가며 꼬박 이틀 밤을 새워야만 했다. 그는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고서야..
상상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단순히 목전에 두지 않은 물체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본질적인 심상 말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감각 체계를 타고 들어오는 외부 자극을 차단하다 보면 대면할 수 있는 무의식의 밑바닥. 불안과 걱정은 그곳에서부터 온다. 이를테면 꿈이다. 예지몽이나 선견지명 따위의 신뢰성을 떠나 부지불식간 직면하게 되는 비현실은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매 그저 순응하고, 일말의 현실감이 없는 판타지라고 믿은 채 의식 깊숙이 파묻은 기억이 아니기만을 바라야 한다. 그러니 티모시가 무던히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건, 대단히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는 일 년에 꾼 꿈을 양손으로 전부 셀 수 있을 만큼 공상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꿈을 꾸더라도 따분한 과..
사람들은 신발 밑창을 다 적실 정도로 눈이 내리는 홋카이도를 아름다움의 상징 정도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처음 하루는 아름답다. 여행의 둘쨋날도 셋째 날도 쏟아지는 눈에 파묻힌 채 행복을 나눌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흘이 다 되어가고 되돌아갈 날이 다가오는데도 그칠 기미가 없는 폭설에 긴장하게 되는 거였다. 비행만큼 기상 상황에 자주 휘둘리는 교통편이 없었다. 폭설이야 매년 있는 일이라 지역 대부분에 방비가 잘 되어 주민들이야 지붕이 무너진다거나 갈 곳을 잃을 일은 없었지만 거주하는 이가 아닌 여행객들에게는 천재지변이었다. 그들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는지 공항의 통유리 벽면에 흰 눈밭이 반사되어 아름답게 산란했다. 건조한 내부에 뻐근해진 눈가를 문지르니 마치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신치토세 공항은..
반나절하고도 아홉 시간 전부터 유럽에 닥친 폭설은 갑작스러웠고 동시에 모든 일정을 무너뜨리기 충분했다. 기상 악화가 지난할 것을 감지한 항공사들은 전광판을 통해 앞다퉈 기약 없는 연착을 알렸으며 이미 하루가 지난 기체는 결항 알림을 띄워놓기도 했다. 그칠 기미가 없어 보이는 눈보라에 공항 내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여기저기서 분노에 젖은 항의의 목소리가 들렸고 어딘가에서는 급히 전화를 걸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성토하기에 바빴다. 여러 소음이 섞여 이젠 거의 아마추어 하모니처럼 들렸다.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사정을 묻지 않았고 궁금해하지 않았다. 대도시의 사람은 대체로 주위를 둘러볼 여유 따위가 없다. 티모시는 피곤에 젖은 눈을 부비며 이 모든 상황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렇게 보면 뭐가 제대로 보이겠어?” 핀잔은 등 뒤에서부터 날아왔다. 백로처럼 목을 꺾으며 시체를 거꾸로 보려던 나카에는 고개를 바로 들고 현장을 돌아봤다. 현장 안쪽에 들어와 있는 요원은 총 셋. 그중 하나는 폴리스 라인 근처에서 민원을 상대하고 있었다. “밤은 춥다구.” 민원인은 막무가내로 성토했다. “불알이 두 쪽 다 떨어져 나갈 것 같다니까. 응?” 그는 머리가 덥수룩하게 길고 꾀죄죄한 몰골로, 아무래도 거리를 떠돌면서 이 일대를 일종의 거주 구역 삼은 모양이었다. 변변찮은 외투도 못 걸친 차림이 어지간히 추워 보이기는 했다. 닳아빠진 집업 위로 고작 낡은 묵주 하나가 흔들거렸다. 안으로 밀고 들어오지는 못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 역시 없어 보였고, 막내는 그를 단호히 밀어내지 못한 채 쩔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