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円の呪い
일고교 짭근 AU
모가미 유리에게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버릇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태도가 웃어른의 눈에 버릇없어 보일 것이매 넘어지기 쉬운 버릇이니 교정하는 게 좋다고 하루가 멀다고 지적했으나 유리는 부모의 장례식에서마저 상복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자판기 버튼 두 개를 한 번에 누르는 발랑 까진 아이로 자랐다. 모가미 일가가 파멸을 맞이했을 때 아들은 슬퍼할 틈도 없이 발로 뛰어야만 했다. 쌩쌩한 무릎 관절이 다 나갈 정도로 오래 정좌해야 했고, 이름도 항렬도 심지어는 얼굴도 모르는 친인척-이제 와 회고하건대 그게 정말 혈족이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및 지인과 어색한 만남을 가져야 했으며 점점 감겨오는 눈을 억지로 떠 가며 꼬박 이틀 밤을 새워야만 했다. 그는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고서야 겨우 사찰 가장 안쪽을 벗어날 수가 있었는데, 자판기 앞에 섰을 때 주머니에 든 동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챙긴 동전이 묘하게 크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모자란 십 엔은 어깨 너머로 침범한 다른 이가 치러주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멋쩍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는 자신을 나카에 료타라고 칭했다. 료타는 허리를 숙이는 수고까지 들여 작은 손에 음료 한 캔을 쥐여주고 난 후 한참 어린 유리에게 양손으로 명함을 건넸다. 유리는 선뜻 받아든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이들의 장난질이 아닌 진짜 어른의 명함을 쥐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부친에게는 번듯한 명함 하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특별히 더 고통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하루를 삼키는 데 드는 수고를 축소시켜 주는 마법의 주문이었다. 사실 그는 제 삶을 그리 고통스럽다 여기지도 않았으므로 그다지 애쓸 필요도 없었다. 주머니를 뒤적이던 유리는 손에 잡힌 코인 하나를 퉁겨 올렸다. 양면이 사정없이 뒤집히며 허공 속에서 회전한다. 자연스럽게 손등 위로 추락한 코인에는 벚꽃도 오동나무도 아닌 유치한 단풍이 그려져 있다. 그건 게임센터의 기기에서만 통하는 마법의 화폐였다.
나카에 치세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아주 풍족했느냐면 또 긍정할 수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그랬다. 그에게 부족한 거라고는 예의나 배려 따위가 전부였다. 그로 인해 건전한 친구도, 좋은 성적도 남의 이야기가 되었지만 나카에 가는 여전히 치세를 사랑했기에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하여 치세는 교무실 한복판에서 출석부로 머리를 후드려 맞는 일이 있더라도 여전히 뻣뻣한 고개를 숙이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남의 말이라고는 잘 들어 먹지를 않으니 치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 뿐이었다. 갑자기 현관을 박차고 침범한 유리 역시 그 인생에 큰 오점도 치적治績도 되질 못했다. 당장에는 말이다.
그러나 무슨 일에건 예외는 있다. 누군들 치세의 거센 성질을 영 버티질 못해 학기가 시작하고 일주일이 못 지나 그의 곁에서는 멀쩡한 여학생을 찾아볼 수가 없었는데, 며칠 전부터 눈에 거슬리는 학생이 하나 생겼다. 목전에 닥친 일을 회피하고 보는 성향은 못 되었기에 삼 일간 초짜 스토커처럼 붙어 다니는 여학생을 무리하여 양지로 끌어내고야 마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 애는 남의 캐비닛에 마음대로 손을 대는 현장을 발각당했음에도 좋아하는 연예인을 본 팬마냥 양 뺨을 붉혔다. 실루엣이나 뒷모습만을 보았을 때는 누구인지 추측할 수 없었지만, 얼굴을 보니 금방 알아챌 수가 있었다. 공주잖아?
치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상대의 귓가는 더욱 달아오른다. 아무리 세상만사 관심 없는 것처럼 굴어도 교내 유명인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이름은 가물가물했지만 극을 올릴 때 항상 히로인 자리에 서는 학생이었다. 그건 상대가 나카에 치세 만만찮은 유명인이라는 의미였다. 지나치다 흘끗거리는 동급생들은 이제 떠나질 않고 둘을 둘러싸려 들었다. 원치도 않은 연극 무대에 선 기분이라 영 달갑잖았다. 여전히 웅얼거릴 뿐이지 제대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이에 치세는 선뜻 질문한다. 용건이 뭔데? 여학생은 마치 그 말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제껏 답답하게 군 게 누구냐는 듯 당돌하게 내뱉는다. 사귀어주세요!
유리의 왼팔을 독차지하는 여학생은 대부분 비슷했다. 평균보다 작은 키에 귀여운 얼굴. 그러나 성격은 모두 제각각이었는데, 이번 상대는 교내 가십에 관심이 많아도 지나치게 많은 타입인지라 사람이 다섯 이상 모여있는 곳은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 사람이었다. 체구가 아담한 여자친구는 대열 너머 사건의 근원지를 들여다보고 싶어 했지만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그 키로는 무리였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듯 둥글게 뜬 눈으로 남자친구를 바라보았으나 유리는 관여하지 않고 외면하고 만다. 소란스러운 일에는 애초부터 휘말리지 않는 게 정답이다. 그러나 무심코 고개를 추켰을 때, 군중 너머로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착각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건의 당사자는 한참 전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도 운명적인 눈 맞춤은 불가능하지 않나. 유리는 멍청하게 서 눈을 두어 번 깜박인다. 세로로 긴 나무토막 같은 몸. 그리고 조금 못되게 웃을 줄 아는 얼굴. 측근의 여자친구와 닮은 구석이 성별을 제한다면 단 하나도 없는 학생이 군중 한가운데 서 있었다. 하여튼 못 알아볼 리 없는 얼굴이다. 치세는 상대를 붙들어 바로 세웠다. 덕분에 학생의 붉어진 귓가가 저 멀리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유리는 그 여학생이 누구인지 알았다. 연극부원인 여자친구의 공연을 보러 갈 때마다 큰 배역을 도맡고 있던 학생. 치세는 명찰을 가리고 있던 밀색의 머리카락을 걷어낸다. 익숙한 색의 명찰 하나가 달려 있었고, 치세와 유리는 동시에 발음한다.
유리百合.
수도 없이 발음해 보았던 이름인데 이상하리만큼 입에 달라붙질 않는다. 유리, 유리……. 처음 듣는 이름이라도 되는 듯 몇 번 되뇌어도 그랬다. 하여 치세는 발음하는 방법을 조금 바꿔보기로 결정한다. 유리는 설렘인지 긴장인지 모를 것 때문에 바들거리느라 알 수 없었겠지만, 치세의 시선은 당신이 아닌 멀리 선 남학생에게 가 있었다. 너, 유리ゆり였구나?
남들 보기에는 열렬한 유리의 구애에 그 지랄맞던 치세도 홀랑 넘어가 버렸다는 러브코메디식 전개로 보였겠지만, 실상은 첫 단추부터 삐걱거리기로는 둘째갈 데가 없었다. 애초부터가 애정은커녕 아무런 감정도 없는 연애가 오래갈 리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일방적인 애정 공세로 평탄하게 이어지던 관계는 이 주를 막 지나던 시점에 금이 갔다. 치세의 손을 누르듯 매만지던 유리는 묻는다.
있잖아, 너는 나랑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치세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고, 무얼 바라는지 대충은 알 것도 같았다. 그는 유리에게 묻는 것보다 먼저 입을 맞추는 성의를 보였다. 유리는 분홍빛 손아귀로 치세의 뺨을 감싸고 아랫입술을 간질이듯 깨문다. 유리에게는 귀여운 비밀 하나가 있었는데, 그건 부끄러울 때 손가락 마디부터 붉어진다는 사실이었다. 치세는 이때쯤 불유쾌한 자각이 든다. 유리百合는 유리ゆり와 털끝 하나도 닮지 않았다. 심지어는 성별마저도. 불현듯 상대를 떼어놓는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유리는 순순히 멀어지더니,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너, 내 이름도 잘 모르지?
치세는 곧바로 응한다. 알아. 유리잖아. 그 대답에 더 울화가 치민 것처럼 고개를 바짝 쳐든다. 그게 아니라 성 말이야. 처음엔 살갑게 불러주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 넌! 그럼에도 치세는 대답하지 못했다. 유리는 이제 히가시카 고교 남학생 중 절반을 홀렸다는 청초한 낯으로 악을 지르고 있었다. 어디에서 거절 한번 당해본 적 없을 테니 자존심에 상처가 날 법도 했다마는 정말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문득 발치에 동전 하나가 추락한다. 유리가 마구잡이로 던져댄 것 중 하나였는데, 가슴팍 어드매에 맞고 떨어진 모양이었다. 덕분에 아슬하게 매달렸던 플라스틱 명찰까지 바닥행을 못 면했다. 그는 제풀에 지쳐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치세는 그를 달랠 만큼 다정한 성정이 못 되어서 계속 발치만을 바라보았다. 그래. 우리의 만남은 처음부터 불합리하고 백해무익하다.
백 엔도 아니고 십 엔짜리 동전이었다. 허리를 숙여 그걸 손에 쥐었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던 건지 금속의 동전이 따뜻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와 함께 유리의 립스틱을 줍고 보니, 차게 식은 옥상 바닥에는 명찰 하나가 외로이 버려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쯤 위화감이 들었던 것 같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름이 조금 달랐다. 그 역시 유리ゆり였다.
十円の呪い
나카에 일가와 모가미 일가의 유일한 공통점은 식사를 함께한다는 점이다. 특이점이 있다면 모가미 일가에서는 아침을, 나카에 일가에서는 저녁을 함께한다는 것 정도. 기이하게도 두 시간은 모두 동일했다. 나카에 하나코는 그들을 위해 항상 네 명분의 식사를 준비했다. 대부분 하나 혹은 두 자리가 비었지만, 유리만은 큰 일이 없다면 그 자리를 지키고자 했다. 몇 년이 지나면서 그 의미는 퇴색되어 저녁 식사는 하나코와 유리만의 약속이 되어갔다. 4인용 아일랜드 식탁의 가장자리에 앉아 조리대 너머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자니 그건 꼭 종편 드라마에서나 보던 화목한 가정을 닮았다. 노력에 비해 일식에는 재능이 없던 하나코의 식사는 싱겁거나 소금기가 과했다. 오늘의 샐러드에서는 신맛이 심했다. 그러나 지적하지 않고 목구멍 너머로 밀어 넣는다. 언제나처럼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보다 먹는 속도가 조금 느린 하나코는 오늘도 일찍 귀가하지 않는 치세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았다. 유리는 그게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그러면 제가 데려올게요.
겹친 식기를 든 채 의자를 밀고 일어선다. 허락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등을 보이는 일에는 도가 튼 건지도 모르겠다.
유리가 생각하기에 나카에 부인의 가장 큰 문제는 다 큰 자식을 너무 사랑한다는 거였다. 군식구에게 그릇 닦는 일조차 맡기지 않을 만큼. 이처럼 그 역시 부인의 사랑하는 자식 중 하나인지라 하나코는 유리의 희생-처럼 들렸던 제안-을 당연하게도 거절했지만 유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태 신맛이 감도는 입안을 헹굴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발치에는 주인이 분명한 담배꽁초가 몇 까치 쌓여있었다. 계절감 없이 불어오는 시린 바람이 매캐한 향취마저 앗아갈 게 분명했다. 겸사겸사 밀린 메일을 확인한다. 별로 성실한 답장을 하는 타입은 아니라 주고받는 메일주소들이 외울 정도로 익숙했다. 유리는 대부분의 메일을 읽고 넘겨버렸다. 답신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때쯤 발랄한 알람 소리가 울린다.
[지금 뭐 해?]
[보고 싶어(՞ . .՞)...♡]
이리도 애교 섞인 텍스트라니. 메일 주소를 확인하지 않아도 발신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유리는 네 개피째 불을 대려다 말고 타이핑을 시작했다.
[잠깐 밖이야]
[연습은 끝났어?]
[응 어두워서 무서워]
[。・゚꜀( ꜆>-< ̥)꜆゚・。]
다시 불을 붙이려는데 답신이 하던 일을 끝내기도 전에 돌아온다. 익숙한 어리광이다. 이번 축제에 올릴 극은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여자친구의 배역은 로렌스-애초에 성비가 로미오마저 여학생이 맡을 정도로 성비가 어긋난 동아리였던지라 유리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말았다-였다. 갈등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정신 나간 수도사 말이다. 하여튼 이 메일에 어떤 답을 주어야 할지 알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유리는 어느새 긴 손톱으로 폴더의 뒷판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유리百合 말인데, 잘 아는 사이야?]
버튼을 누를 때마다 물고 있던 담배가 까딱거렸다. 보내려다가도 전송 버튼에 영 손이 가질 않는다. 짧은 고민 끝에 문장 자체를 삭제하고야 만다.
[큰길로 조심해서 들어가]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남자친구 행세를 하는 문장은 가볍게 누르면 쏟아지는 자판기처럼 출력된다. 애초에 보냈어야 할 대답은 이게 옳았다. 유리는 그제야 담뱃불을 붙일 수 있었다.
[들어갈 때 전화해도 돼?]
응. 짧은 응답을 처리하던 유리는 복도 끄트머리의 센서등이 켜지는 것을 보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오래 앉아 있던 탓에 굽힌 채로 혹사당한 무릎 관절이 영 뻐근했다. 나카에 일가는 엘리베이터와 가장 먼 508호에 거주했고, 복도 천장에 낱낱이 깔린 센서등은 유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순서대로 불이 들어온다. 얼마 못 가 점등 행렬이 멎는다. 508호 몫의 센서등은 막 이사 오던 때부터 고장이 나 있었으므로 유리의 머리 위는 여전히 암흑이다. 발끝을 따라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이는 목전에 멈추어 선다. 유리의 휴대폰이 사정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랄하게 울고 있었다. 마지막 메시지의 전송 버튼을 눌렀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발치를 내려다보던 상대의 고개가 삐딱하게 오른다. 그는 미묘하게 웃고 있었다. 유리는 그 얼굴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도 깨닫는다. 그리고 광대 어드메의 긁힌 자국과, 찢어진 건지 터진 건지 알 수 없게 딱지가 앉아버린 입술까지도. 양지에 있던 단화는 지적할 틈 하나를 주지 않고 새까만 어둠 속을 딛는다. 유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상대는 오만하게도 검지를 쳐든 채 내려쥔 폴더폰에 손가락질한다.
받지 그래?
동시에 휴대전화 사이드의 라이트가 반짝인다. 자정이 막 지나고 있었다.
얼굴이 엉망인데…….
한 대 맞았어.
치세는 유리를 달래지 않고 눈치 없이 동전과 소지품을 주워다 바친 대가로 왼쪽 뺨을 얻어맞았다. 백오십은 될까 말까 한 조그만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치세는 그걸로 유리의 첫키스에 대한 값을 치렀다고 생각했다. 툭툭 끊어지는 말투로 뱉는 무용담을 흘려듣던 유리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원을 끈 것도 아니라 주머니 속에서도 진동을 반복했다. 그의 여자친구는 전화를 무시당하는 일을 끔찍하게도 싫어했고, 그 일로 가벼운 말다툼을 두어 번 겪은 적 있기에 그 역시 치세의 꼴을 못 면할 것이다.
전화 받지?
치세는 다시 한번 강권한다. 당신 뺨의 안위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소리가 거슬렸기 때문이다. 유리는 순순히 플립을 연다. 여보세요? 텍스트만치로 애교 섞인 목소리가 전파를 탄다. 유리는 여전히 휴대전화를 든 채로 치세를 바라본다. 반대편에서 응답이 없어 여자친구는 두어 번 더 목소리를 냈다. 여보세요? 듣고 있어? 그는 아주 천천히 플립을 다시 닫았다. 전화가 끊어진다. 여자친구는 무조건 제가 원할 때, 먼저 전화를 끊어야 하는 공주님인지라, 유리의 처우는 보다 확실해지고야 말았다. 부지불식간 터진 입안이 아렸다. 피가 멎었을 게 분명한데도 쇠 맛이 났다. 치세는 유리가 주머니에 전화기를 밀어 넣는 것까지 지켜본 후에야 알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겨우 아문 여린 살을 깨물었던 모양이었다. 불만 때문이었다. 유리의 고백을 받아 섬긴 것도 나. 먼저 키스한 것도 나. 얼마 못 가 이별을 고한 것도 나. 기어이 얻어맞고 난 자리를 다시 깨문 것까지 전부 나카에 치세가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목전의 당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당초 모가미가 나카에의 탈을 쓴 채로 삶에 치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아무런 일도 없지 않았겠는가?
나카에는 생각한다. 관여한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다른 이들의 착각과 별개로 감정에는 방향이 없다. 그렇기에 타이를 쥐어 당긴다. 말이 좋아야 타이를 쥐었다지 실상 멱을 쥔 것과 진배없는 움직임이다. 유리는 힘을 쓰지 않는 건지 못하는 건지 제가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한번을 반항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적당히 힘을 주어 당겼다. 예상대로 상대는 휘둘리듯 끌려온다. 면과 면이 지척에 오는 것도 한순간이다. 그럼에도 유리에게는 당황한 기색이 없어서 만족스럽진 못했다. 치세는 유리가 중심을 잡을 틈도 주질 않고 입을 맞춘다. 그것도 모자라 혀를 밀어 넣기까지 했다. 연인에게 하듯 다정한 스킨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키스가 아닌 건 아니었다. 치세는 요구하는 것보다 무언가 탐구하는 것처럼 굴었다. 한참을 복기하듯 파헤치던 누이는 동생이 숨이 차 어깨를 쥐었을 때 떨어져 주었다. 치세는 이 돌발 행위로써 아주 명료한 결론을 도출해 낸다. 생각보다 좆같지 않네? 유리와의 키스는 이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챌 만큼 별로였다마는. 그가 태우는 담배의 맛만큼 씁쓸한 자각이었다. 유리는 그제야 발화한다.
방금 뭐 한 거야?
뇌리를 거치지 않은 말이다. 치세는 걸치고 있던 자켓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가슴팍에는 익숙한 이름中江 ゆり이 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네가 알 게 뭐야.
모가미는 생각했다. 아니, 나카에는 생각한다……. 책임을 지기에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선택권이 없지 않았느냐고. 그는 얌전히 살고 싶다. 나카에의 부모에게 겉보기만은 건실한 아들이 되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쓸쓸한 장례를 기약하고야 만다. 치세는 복잡한 심경을 내보인 게 언제냐는 듯 후련한 얼굴로 복도의 아주 끄트머리에 침을 뱉었다. 마치 부정한 것을 토해낸 후 입을 헹구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그는 세 번 실패했지만, 유리를 유기한 채 귀가하는 데 성공한다. 동요보다는 이제야 긴장이 풀린 것만 같았다.
홀로 선 유리는 주머니 속을 구르는 코인을 쥔다. 치세가 모나게 굴어도 잘 돌봐줘. 네가 오빠잖아. 사이좋은 남매를 바라던 하나코의 면면이 감긴 망막 너머 선명하다. 글쎄요, 어머니. 그 애는 내가 처음 오던 날부터 오빠 취급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그때 뱉지 못했던 말이 여전히 목에 걸려 있었다. 코인을 사찰에서처럼 허공에 퉁겼다. 단풍이 보이는 날이면 불운이 유리의 뒤축을 따라 오르고는 했다. 유리는 그때부터 손등 위로 추락한 동전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알겠지만 우리의 만남은 백해무익하다. 하여 양친에게는 정말 죄송한 소식이다마는, 말마따나 관여한 모두가 책임을 져야 했다. 내가 순진한 체 아버지의 죄상을 고백했을 때부터. 나카에 료타가 자판기에 십 엔을 밀어 넣었을 때부터. 나카에 하나코가 식탁에 수저 한 벌을 늘렸을 때부터. 유일한 자식인 나카에 치세가 기어코 굴러온 돌에 입 맞추는 사고를 범했을 때부터…….
가슴께까지 오는 콘크리트 난간 너머로 코인을 유기한다.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유리는 전화를 받지 않고 열쇠를 밀어 넣는다. 치세와 달리 단번에 넣어 돌리는 데 성공한다. 두 사람은 족히 들어갈 만큼 활짝 열어젖히면 현관의 노란 빛이 어두웠던 사위를 감싼다. 다녀왔습니다. 중얼거리듯 건넨 인사에도 하나코는 반갑게 맞는다. 직후 문이 닫혔다. 회고하건대, 나에게 종편 드라마에 나올 법한 가정을 꾸리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건지도 모른다.
*계속해보겠습니다
*途上 谷崎潤一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