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ERVOIR DOGS
상상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나? 단순히 목전에 두지 않은 물체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본질적인 심상 말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감각 체계를 타고 들어오는 외부 자극을 차단하다 보면 대면할 수 있는 무의식의 밑바닥. 불안과 걱정은 그곳에서부터 온다. 이를테면 꿈이다. 예지몽이나 선견지명 따위의 신뢰성을 떠나 부지불식간 직면하게 되는 비현실은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매 그저 순응하고, 일말의 현실감이 없는 판타지라고 믿은 채 의식 깊숙이 파묻은 기억이 아니기만을 바라야 한다. 그러니 티모시가 무던히 시간을 보낼 수 있던 건, 대단히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는 일 년에 꾼 꿈을 양손으로 전부 셀 수 있을 만큼 공상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꿈을 꾸더라도 따분한 과거 회상에 불과했다. 학창 시절의 기억이라거나, 한참을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 나쁘지 않은 추억들……. 고이 썩어가는 나쁜 추억은 전부 무덤에 묻었으니 티모시는 잠을 두려워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조금 로맨틱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근래 티모시는 나카에의 꿈을 꾸었다. 하루이틀간의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주일 내도록 말이다. 배경이 뒤틀려도 이 무대에 둘을 제외한 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 인지하지 못한 건지도 모르지만 꿈속에서의 티모시에게 그따위 걸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꿈의 장르가 코메디나 드라마였다면 아주 기꺼워 춤을 추겠고 차라리 로맨스 정도만 되었더라도 이리 고달프지 않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무의식 속 티모시가 선택한 건 가끔 아날로그 호러이며 슬래셔고 미스터리 서스펜스에 대부분 스릴러다. 그곳에서 나카에가 맡은 역할은 높은 확률로 미치광이였고 티모시의 배역은 가련한 피해자거나 미련한 방관자였다.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러도, 자신을 동정해도 어쩔 수 없다. 꿈은 주인의 무의식을 대변하기 마련이니까.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어디에서 진창 구른 건지 먼지투성이가 된 나카에를 목격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회용 랩을 주방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버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동거인의 귀가가 늦는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어서 새벽 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에도 전화 한 번 걸어볼 생각을 못 했다. 쓰레기 위로 조각난 손톱이 추락한다. 손가락을 다치지 않아 다행이지, 칼을 쥐다가 손톱을 베는 건 부상의 축에도 못 끼었다. 덕분에 정돈할 틈도 생겼으니 잘된 일이지. 펜을 달칵거렸다. 노란 포스트잇에 정돈된 영어가 적혔다. 반쪽은 아침에, 남은 건 도시락으로. 랩으로 감싼 접시 위에 쪽지를 붙이던 중 아주 느리게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백한 얼굴로 문을 연 나카에는 신발도 다 벗지 못하고 쓰러졌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다 온 건지 멀쩡하던 옷은 의문의 액체로 얼룩져 있었고 다 헝클어진 머리칼에도 불순물이 묻어 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쉬고 손을 빗 삼아 그의 머리를 빗어주었다. 손길을 따라 먼지가 덩어리져 떨어졌다. 일으켜 세우진 못할망정 똑같이 현관에 자리 잡고 앉은 꼴이 꽤 웃겼다. 바깥에서 이질적인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다.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 노크 소리였다.
나야. 문 열어.
관성적으로 움직이던 손길이 멎었다. 복도에 소리가 새지 않도록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마치 나카에가 비밀번호를 누르던 것처럼 신중히. 바깥에서는 여전히 호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티모시. 손을 다치는 바람에 잠금이 잘 안 풀려. 그러니까 문 좀 열어. 거기 있잖아. 그의 목소리는 점차 격양되었고 종국에는 문짝을 걷어차기까지 했다. 발치에 잠든 나카에를 내려다본다. 옆집의 성질 더러운 놈이 문을 박차고 나올 때가 되었는데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상황을 나 대신 해결해 줄 사람은 없다. 나는 작게 난 문구멍 너머를 들여다 보았다. 내게는 바깥에서 문을 긁어대는 이가 진정 나카에인지, 혹은 불청객인지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밖을 바라본 순간 까무러쳤고, 침대에서 눈을 떴다. 묘하게 부어오른 후두부를 문지르며 기분 나쁜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악몽은 구체적으로 반복된다. 어느 날에는 쓰러지기 직전인 모텔 카운터 직원이 되어 살해 및 시체 처리 현장을 감시카메라로 들여다보았고, 또 다른 날에는 한 끗 차이로 손도끼를 든 채 피칠갑-남의 것인지 나카에의 것인지 티모시는 알 수 없었다-을 한 나카에를 피해 욕실에 틀어박히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일평생 배우를 꿈꾼 적도 없는데 꼭 스탠리 큐브릭 장편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티모시는 그날부로 모든 영상매체를 끊었다.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일본 드라마는 조금씩 귀가 트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더 이상 티모시의 도피처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가 일방이건 양방이건 교류 자체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티모시가 홀로 남은 일과 시간은 더없이 정적이었다. 그는 사소한 생활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 읽지도 못하는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간을 보내거나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다. 덜미를 문지를 때 어느새 길어진 뒷머리가 손에 닿았다. 외출하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카에가 없는 집안은 이토록 삭막했다.
이변 없이 새벽 세 시에 터져 나오는 소리를 겨우 억누르며 눈을 떴다. 양손을 각각 소파 팔걸이에 나누어 묶인 채 세뇌를 당했다. 언제는 아니었냐마는 이번에야말로 살해당하기 직전이었다. 진정 식은땀으로 젖은 등판이 축축했다. 티모시는 그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페이크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나카에의 스너프 필름을 돌려보는 일에는 꽤 심한 정신적 소모가 동반되었다. 언젠가부터 눈을 감기만 해도 귓속에서는 신경질적인 노크 소리가 들렸고 문구멍 너머로 마주친 심연 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내용이 어찌 되었든 악몽은 언제나 그 눈동자를 마주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덕분에 그의 신경쇠약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수면 시간은 짧아지다 못해 쇼트 슬리퍼를 능가할 수준이 되었다. 그런 몸이 신체를 잘 받쳐줄지가 의문이라 반쯤 세면대에 기대어 선 채 희게 질린 얼굴로 힘없이 칫솔질하는 티모시를 목격한 나카에는 가볍게 비웃었다.
안 그래도 창백한데 거의 시체가 됐네.
그래. 덕분에…….
웅얼거리는 소리에 양칫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현실 구분이라도 할 줄 아는 건 정말 다행이었다. 적어도 역으로 동거인을 결박하고 안정을 찾을 일은 없었으니까. 점점 추워지는 날씨에 두꺼운 외투를 걸치던 나카에는 티모시의 아래턱을 쥐어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마른 손에도 박하 향 거품이 묻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반항하지 않는 태도는 물론이고 그나마 부드럽던 피부는 순식간에 생기를 잃어 거칠어졌으며 다크서클은 광대까지 내려왔다. 이건 뭐 어디 아픈 애처럼……. 나카에는 수면 부족으로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운명처럼 둘의 눈이 마주친다. 평소에도 아주 맑다고는 할 수 없었겠지만 의료 지식이 전무한 나카에가 보아도 티모시의 눈은 뭐에 홀린 듯 혼탁했다. 그는 만족할 만큼 들여다보고서야 티모시를 놓아주었다.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병원 가라…….
티모시는 저도 모르게 꽤 힘이 들어갔던 건지 나카에의 손자국이 남은 피부 가죽을 문질렀다. 나 보험증이 없는데. 그의 대답에 나카에는 숨기지 않고 혀를 찬다. 그런 건 또 어디서 주워 들어서는……. 그럼 그렇게 병자처럼 살던가. 여전히 세면대를 등진 채 우두커니 선 티모시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카에는 그의 응답을 기다려줄 생각도 없던 사람처럼 신발을 고쳐 신은 후 외출했다. 무슨 바람이 든 건지 평소보다 두 시간은 일찍 퇴근한 나카에의 손에 보험증 하나가 들려있던 건 티모시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티모시의 한텐 주머니에 위조품을 욱여넣으며 소매의 짓이겨진 자국을 응시했다. 불로 지져진 흔적이었다. 남의 옷 빼앗아 입은 것 같았는데 이젠 네 옷 같네. 티모시는 소매를 더듬어 흔적을 되짚었다. 그거 이제 이 나라 사람처럼 보인다는 뜻인가? 상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고 병원이나 가 봐…….
한 손에 담배를 든 채로 보험증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한낮의 햇빛이 그 위를 노랗게 비추었다. 여권에 신분증을 잇는 보험증. 이제 유리ゆり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세 종류가 되었다. 여전히 어색하지만 한 사람이 겨우 불러주는 이름보다 이게 진짜 이름처럼 느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증서를 향해 아래쪽에서 작은 손 하나가 뻗어 나왔다. 나도 보여줘. 나도 구경할래. 카노의 목소리였다. 그는 작은 움직임으로 보험증을 건넨다. 둘 사이에는 여전히 통역이 필요했지만, 짧은 대화 정도는 서로 뉘앙스로 알아들었다. 어차피 숨길 필요도 없는 증명이었다. 티모시는 자신을 따라 하듯 부산스레 움직이는 고사리손을 좌시하며 차근히 주변의 종합병원이나 정신의학과 위치를 복기했다. 현대 의학의 힘을 빌리는 게 멍청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특히 이런 사정은 초기에 잡는 게 중요했다. 떨어뜨리지 마. 카노는 주의를 주자 그제야 보험증을 바로 들고 천천히 글씨를 읽어나간다. 학교도 안 다니는 애가 술술 읽어내리는 모습이 퍽 신기했다. 까막눈 친구인 줄 알았더니 실망이네. 티모시의 중얼거림에 문득 고개를 든다. 알아듣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카노는 무어라 말을 붙였지만 티모시 역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기어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성이 엄청 흔하다구. 사토는 우리 맨션에도 다섯 명이나 살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유리라고 부르게…….
사토? 나카에가 아니라?
나카에?
영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이 어린애는 거짓말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라 정말 처음 듣는 게 분명했다. 의미가 분명한 티모시의 손짓에 카노는 순순히 보험증을 돌려놓는다. 증서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아도 무슨 글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일곱 살짜리도 아는 한자 두 개인데.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연기가 샌다. 왜 한 번도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짧게 타들어 간 담뱃불이 검지 끝을 간질이는 감각에 정신이 되돌아온다. 통증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불이 꺼진 꽁초는 맨션 아래로 추락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유는 간결하다. 친히 이름을 붙여주신 이에 대한 신뢰 때문이겠지. 새삼스럽지만 이 섬에서 티모시가 능숙히 소통할 수 있는 상대는 그뿐이다. 티모시는 호기심으로 둥글게 뜨인 카노의 눈을 보았지만 그저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주고 만다. 고마워. 추우니까 이제 들어가. 카노는 티모시의 짧은 일본어를 꽤 좋아했다. 모든 의문을 품고 제집으로 돌아가 줄 만큼. 베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RESERVOIR DOGS
가끔은 말이지,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그 순간 하나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지금까지의 악몽은 예고에 불과했던 걸까? 아주 낮은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핏물을 보며 아득하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이어서 두꺼운 현관문에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크기에서 무게감을 추정하자니 누군가 제 몸을 지탱하다 못해 무너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특정하자면 내가 아주 잘 아는 성인 여성 정도의……. 얇게 깔린 핏물이 현관 바닥을 절반 이상 덮을 때쯤 티모시는 기대고 있던 벽면에서 몸을 떼었다. 바깥에 있는 이의 정체보다 이 참상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에 대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작게 난 문구멍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좁은 시야에는 반대편 벽에 비추어 보였을 뿐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 정도 출혈이라면 잘 쳐줘도 기절이다. 그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어느날처럼 한숨을 몰아쉰 티모시는 조금 홀가분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으나 잘 열리지 않았다. 힘을 주어 밀자 천천히 열린 문 사이로 무언가 추락한다. 그건 그가 아주 잘 아는 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카에는 당신 덕분에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내를 알긴 하는 건지 평온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버려져 있었다. 다른 고상한 표현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티모시의 시선에는 그런 식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일 뿐이었다. 길게 눈을 감는다. 근래 학습한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아주 평화로운 삶을 살아온 건 아니었지만 이토록 지난한 삶은 이번 달이 처음이다. 그는 이 상황이 꿈일 가능성에 대해 점쳤다. 나는 나카에의 귀가를 기다리며 담배 세 대를 피운다. 카노와의 대화를 마친 후 재떨이를 비우고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피로에 베란다 문턱을 채 넘지 못하고 잠이 든다. 잘못 기울어져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생긴 인지 왜곡으로 또 황당무계한 꿈을 꾸는 거다. 그래……. 이건 상상이다. 근래 있던 정신 나간 나날이 내 뇌리를 헤집어놓은 게 분명하다.
정신을 다잡은 후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작금의 상황을 마주하자 그제야 피가 식었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미묘하게 더 커진 피웅덩이 뿐이었다. 문이 열리며 측면으로 쓰러진 몸체를 정자세로 되돌렸다. 웃옷의 팔 부분이 크게 찢어져 환부를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차가워진 손끝으로 늘어진 손목을 쥐어 맥을 짚는 겸 상처를 확인한다. 잘 벼린 날붙이로 각친 절상이다. 죽으라고 벤 게 아닌 모양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저 경고에 불과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부상이 깊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카에의 허리춤을 감싸안고 천천히 자세를 세웠다. 티모시가 그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한 채 집안에 들여 욕조에 집어넣는 것에만 자그마치 십오 분이 걸렸다. 피와 식은땀에 젖은 자켓과 셔츠를 벗겨내어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동시에 아래에 쏟아진 흔적들을 정리할 생각에 벌써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티모시는 팔뚝을 비롯한 살갗에 묻은 자국을 닦아내며 품이 큰 후드집업 하나를 걸쳤다. 이 열악한 환경에서 수혈까지는 무리다. 뇌 내서 수많은 약물과 기자재의 명칭이 뒤엉겼다. 하여간 바다너머에서도 사람을 가만히 두질 못하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 서로에게는.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알아챈 건 가까운 곳의 인기척이다. 그러나 감긴 눈을 뜨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우선 생리적인 눈물이 속눈썹에 엉겨 붙어 그대로 굳는 바람에 깜빡이려 해도 아주 조금밖에 눈꺼풀이 들리지 않았으며 겨우 눈을 뜨고서도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백열등에 눈을 한껏 찌푸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빛에 적응하느라 애쓰고 나서야 아둔한 시야가 넓어졌다. 정확히 일 미터 정도. 그 정도로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건 무리였다. 애초에 머릿속이 와인과 바카디 그리고 맥주를 진탕 퍼붓고 난 다음날처럼 필름이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걸 보아하니 정말 과음인지도 몰랐다. 나카에는 애써 고개를 돌렸고, 그 자리에는 제 팔뚝에 그야말로 고개를 처박은 티모시만이 존재했다. 불편하지도 않은지 차가운 타일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그는 여전히 일본의 좌식 문화에 적응 하지 못했다 불행하게도-로 말이다. 새카만 머리통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미묘하게 흔들렸다. 나카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머리숱이 많네…….
오래 입을 다물고 있었던 탓에 목구멍 너머로 갈라진 소리가 빠져나왔다. 그는 이제야 나카에가 정신을 차렸다는 걸 깨달았는지 조금 경직되었다가 다시금 행위를 재개했다. 그가 무얼 하는지 몰라도 뻐근한 팔을 가져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나카에의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을 알아챈 티모시는 안 그래도 움츠린 상체를 더 웅크려 시야를 제한했다. 보지 마. 포기하지 않고 각도를 바꾸어가며 드미는 고개를 완력으로 밀어내고 나서야 나카에는 포기했다.
왜 못 보게 한담.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好奇心が猫を殺すんだ. 몰라?
나카에는 무거운 숨을 뱉었다. 티모시의 일본어는 보통 단어를 이어 붙인 조립식이었고 아주 가끔씩 온전한 문장을 구사하고는 했는데,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바와 달리 언제나 구어체였다. 텔레비전을 가져다 버리던지 해야지…….
숙련된 목수는 재료 탓을 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글쎄. 작금의 나는 숙련된 수술의가 아니므로 좋은 재료와 파트너가 있다면 지체없이 그걸 택할 것이다. 나카에의 움직임에 벌어진 상처는 원시적으로 지지거나 몇 바늘 정도 꿰매야 출혈이 완전히 멎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꿈에 나올 것처럼 호러틱했지만, 질색하기에 티모시는 너무나도 많은 사연을 겪었다. 베인 상처를 이고 지고 병원이 아닌 집으로 돌아온 미련한 환자와 의학에서 손을 뗀 지가 꽤 된 비운의 의료인 뿐인 비극적인 봉합 과정에서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내가 위치를 알고 있는 드럭스토어 내에서 프롤린 실과 괜찮은 사이즈의 봉합침을 판매했다는 것이매 외출한 시간 동안 환자가 혈액 부족으로 쇼크 증세를 보이지 않았고 학부 시절에도 자잘한 사고를 치고는 했던 의사가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깨어난 나카에는 다시 잠들지 않고 몸을 움직였으며-작은 움직임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사람처럼- 소소한 잡담을 진행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아직 정신이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라 다시 잠재우고 싶었지만 마취 크림도 아니고 제대로 된 의료용 마취제 따위 화타의 탈을 쓴 일반인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욕조 끄트머리에 아슬하게 걸친 나카에의 발끝이 달싹였다. 감각이 둔감하게나마 자리를 찾으며 알아챈 사실인데, 신나는 팝송이 티모시의 휴대전화에서 꽤 큰 볼륨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영화관에서 들은 적이 있던 익숙한 음악이었다. 바깥이 시꺼먼 걸 보아하니 아주 늦은 시간임이 자명한데 여러모로 에티켓이라고는 개나 준 작태였다. 티모시는 귓가를 파고드는 음악이 거슬리지도 않는지 리듬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템포에 맞추어 손을 움직였다. 나카에는 최대한 그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노래를 왜 틀어놔?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으나 티모시의 경고에 장단을 맞춰주려는 심산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를 떠나서라도 제 수술 장면을 모두 눈에 담으려는 악취미는 없었다. 별로 관심이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이런 건.
티모시는 다음 바늘을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찔러넣으면 좋을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손가락을 대어 치수를 재듯 말이다. 목소리는 심드렁하다.
만약 네가 소리 질러도 파티처럼 보이게 하려고.
너 사실 사이코패스지?
말 좀 그만 걸어…….
날카로운 바늘이 다시 한번 살갗을 파고들었다. 나카에가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팔이 가볍게 떨렸다.
좀 살살해. 억하심정 있냐.
그래서, 이겼어?
하하……. 겨우 묻는다는 게 이런 거?
아무래도 티모시는 나카에를 다시 재우는 것보다 그가 봉합 도중 기절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야기를 이어 나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그 역시 이 세상은 이기지 않는다면 파멸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대답 역시 알고 있겠지만……. 궁금한 거지? 걔를 만난 건지, 내가 끝을 본 건지가……. 나카에는 욕조에 깊게 머리를 묻었다. 동시에 팔이 조금 끌려 올라갔으나 티모시는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내게 린치를 가한 이의 최후를 듣는다고 무언가 달라질까. 리벤지의 탈을 쓴 사적 제재가 이루어진 후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카에는 조금 다른 답을 내놓았다. 애석하게도 오늘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고. 그의 이야기는 언제나 길지 않다. 나카에의 말이 끊어지고 적막이 찾아온다. 익숙한 적막이다. 티모시는 손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고 작은 목소리로 그가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해 연설했다. 음주와 폭력을 비롯한 오른팔 사용은 가급적으로 금지. 찬장에 식염수와 소독제를 구비해두었으니 귀찮더라도 드레싱을 잊지 말 것. 그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어서 노랫소리와 괴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병원에 가.
그 정도의 일인가……. 그보다 보험증이 없거든.
티모시는 어느 날의 여자처럼 혀를 찬다. 그건 누군가를 모사하는 것처럼, 때로는 연기처럼 보였다. 그는 보험증을 딱 한 번 사용했다. 수면유도제를 처방받았지만 그건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지. 정신적인 문제라는 게 다 그랬다.
네가 준 가짜 학력도 보험증도 다 너 가져. 이제 사토라는 이름은 네 거야.
별로 마음에 안 들었나 봐?
나카에는 사토를 언급하는 티모시를 보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자세를 고쳐 앉았다. 봉합한 부분이 어긋날까 신경 쓰는 건 티모시 뿐이었다. 애초에 이렇게까지 오래 몰랐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럼 네 신분은.
티모시는 나카에의 추락한 오른손을 펼쳐 들었다. 피로에 새끼손가락이 아직도 조금씩 떨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반사에 가까운 반응이므로 오히려 신경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울퉁불퉁한 손금에 잘 다듬은 손톱이 스쳤다.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은 손바닥 위로 부드러운 곡선이 그려진다.
나な.
히라가나구나.
카か.
제법 잘 쓰네?
에え.
하하…….
아무리 당신에게 내다 버렸다지만 그따위 걸 고이 주워다 쓰겠다는 마음을 나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겠지. 미련 없이 손을 올린 티모시는 마지막 매듭을 짓는다. 하지만 유리는 내 거야. 카노가 그렇게 부르고 싶대. 나카에는 간지러운 손을 말아쥐었다. 드러난 피스트가 까져 있었다. 폭력의 흔적이다.
그게 누군데?
내 하나밖에 없는 친구야.
뭐? 나는 뭔데.
네가 친구는 아니지……. 멀쩡한 왼손이 뒤통수에 날아들었다. 깜빡하면 욕조에 이마를 부딪칠 뻔하여 잠이 다 깨는 기분이었다. 그는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대화 도중 나카에의 정신이 몇 번이고 깜박였는데, 봉합을 마친 티모시는 충실하게 그의 옆을 지키는 대신 배어 나오는 피를 닦는 데 사용한 거즈를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도피 생활에도 제대로 된 신변 정리를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レザボア・ドッグス
시간은 느긋하게 그의 뒤꽁무니를 쫓았다. 티모시가 손바닥 쪽이 찢어진 일회용 니트릴 장갑을 세 짝째 내다 버렸을 때 나카에는 다시 눈을 떴다. 가물한 시야 너머로 벽면에 난 조그만 창문에서 붉은빛이 새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너 거의 밤 샜다.
그래. 덕분에…….
피곤함에 절어버린 눈이 힘겹게 깜박였다. 긴장과 피로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티모시는 타일 바닥에 늘어진 것-나카에가 정확한 명칭을 댈 수 있는 건 가위와 붕대 또는 거즈뿐이었다-들 중 알약 세 알을 분리했다. 고개만 들어. 나카에는 순순히 머리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약물이 추락하고 생명수와 같은 물을 들이켰다. 무슨 약인데. 티모시는 환자의 궁금증을 제대로 해결할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지도 못하는 이름을 몇 가지 대었다.
그는 나카에가 자신을 뻔히 내려다보고 아무런 응답도 하질 않자 다시 입을 열었다. 파란 건 항생제고 흰색은 수면유도제. 이제는 잠이 오다 못해 귀찮았다.
진통제는 아까 먹였고…….
의식도 없는 사람한테 약을 어떻게 먹인 건데?
…….
티모시의 시선에 걸린 나카에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웃지 마. 상처 터진다고.
아, 알겠다고…….
안주인이라고 이제 바가지를 다 긁네奥さんだからって小言を言うんだね. 그가 일부러 일본어로 중얼거리는 말의 발음을 곱씹었다. 그대로 외워서 카노에게라도 물을 생각이었다. 몇 번이고 반복하는 머리꼭지를 응시하며 가볍게 검지로 그 위를 퉁겼다. 괜히 움직였더니 아물기까지 열흘은 더 걸릴 팔뚝에서부터 통증이 올라온다. 티모시는 자신이 뇌까리던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아버렸다. 정좌하던 자세는 점점 불량해져 거의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문득 코끝에서 독한 화학 약품의 냄새가 감돌았다. 오랜 비행 생활에서 추측하건대 이건 락스의 냄새다. 티모시의 손끝이 벗겨진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욕조에서 일어난 나카에는 그의 허리춤을 감싸안고 천천히 일으켰다. 의식적으로 한쪽 팔을 사용하지 않으려니 그 몸체 하나 옮기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하고야 말았다. 흰 시트 위로 차마 다 닦아내지 못한 핏가루가 추락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티모시는 당신 덕분에 고생하는 환자의 모습을 알긴 하는 건지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하여간 사람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 서로에게는.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